시집에서 읽은 시

깨진 소주병을 바라보며 외 1편/ 허민

검지 정숙자 2022. 3. 30. 02:21

 

    깨진 소주병을 바라보며 외 1편

 

    허민

 

 

  누가 너에게 다녀갔다는 것이다

  누군가 너에게 왔다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누군가 너의 모든 것을 단 한 방울도 남김없이

  가져가 버렸다는 것이다

  주둥이가 깨져 가느다란 목이 사라진 병

  누군가 너의 길고 아름다운 휘파람을 앗아가서

  네가 네 취한 혈류를 모두 마셔버렸다는 것이다

  텅 빈 스스로를 결코 참을 수 없어

  공중을 향해 자신의 목을 수탉처럼 바쳤다는 것이다

  비어버린 생을 용납하기 괴로워

  허공의 무한한 길이 열린 창틀에

  목을 매달아 놓았다는 것이다

  내 안의 누군가, 네 안의 누군가

  너를 비틀어 처형했다는 것이다

  소주 따위야 병신 취급하며 목을 따 버리고

  효수의 나머지를 바닥에 던져 버렸다는 것이다

  자신을 산산조각 냈다는 뜻이다

  산산이 부숴 버리려 했으나

  미련 많던 긴 목과 복잡한 머리만 박살 낸 채

  텅 빈 몸뚱이만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모든 걸 비우려 했지만

  날카로운 한이 되었다는 것이다

  금방 무너져 내릴 금이 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채울 수도 없는 삶이여

  이제 영영 나를 버린다는 것이다

  곧 사금파리가 되어 조각조각 바닥의 반짝임이 된다는 것이다

  지상에 잘게 부서져 가장 낮게 두근거리는

  별빛, 가장 먼 우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한때 한 사람의 가슴을

  그의 청춘을 뜨겁게

  데웠다는 것이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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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덧 나는 시를

 

 

  어느덧 나는 詩를 잃어버린 듯하다

  놀라지도 감동받지도 않는다

  한때는 그것이, 내가 너무 읽었거나

  눈이 높아진 것은 아닐까 생각했었다

  다시 지금, 아픈 몸을 이끌고

  볕 아래 바람을 천천히 흔들고 있는

  화분의 잎사귀를 바라보며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봄날 오후

  나는 시를 잃은 것이다

  처음 만난, 최초의 그녀를 잃어버리듯이

  내가 너를 수줍게 만났을 때

  너는 행간 속 넓은 페이지처럼 하얀 티셔츠에

  아름다운 글자의 배열 같은 긴 머리카락

  뜨겁게 달궈진 불덩이들을 초여름밤 바람 속으로 흩날리고 있었지

  얕은 땀방울 속 침묵의 향들이 은은하게 맴돌고

  작은 몸짓과 눈짓, 난생처음 느끼던

  순수한 운명, 눈동자, 서정적인 우연

  그 옆모습에

  나는 한없이 슬펐고

  크게 매 순간 감동받았었다

  시집은 무수히 하루하루의 먼지처럼 쌓이고

  이미 지나간 것들은 달력처럼 다시 읽어도

  나는 그것들에게 밑줄을 긋지 않는다

  내 옆에 있으나

  나는 시를 잃어버렸고

  너의 처음 얼굴이 지금 곁에서 생각나지 않는 것처럼

  그건 네 형상을 잃은 것이 아니라

  너를 처음 보았던 나를

  잃어버린 것일 게다

  시여, 네가 사라진 게 아니라

  무수한 밤하늘 별들이 내 머리 위

  캄캄한 공중으로부터 영원히 느리게 도달하듯이

  그것을 기다리진 못한 내가

  이승의 유한함처럼 점점이 사라져 버린 것일 게다

  언제나 곁에 있는데 곧잘 감동하던 나여 어느 길로 소멸하였는가

  너는 옆에 있는데

  어느덧 시는 나를 오래도록 잃어버리고

  영원한 애인은

  지난 날카로운 밑줄에 손이 베인 채

  몇 만 광년의 유성처럼

  영영 나를 

  찾고 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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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에서/ 2022. 3. 25. <시산맥사> 펴냄   

  * 허민/ 1983년 강원 양구 출생, 2015년 웹진『시인광장』 제4회 신인상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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