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밤의 서가에서/ 허민

검지 정숙자 2022. 3. 30. 01:52

 

    밤의 서가에서

 

    허민

 

 

  몇 년째

  긴 밤의 도서관을 고독은 서성거렸다

 

  시 코너 혹은 문학들이 가득 꽂혀있던 서가

  나는 내가 서 있는 쪽 보이지 않는 맞은편에

  누군가 이쪽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이 원하는 책의 제목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건 어떤 이야기의 시작이었을까 

 

  소리였을까, 숨결의 향기였나

  아님 깊은 고독의 직감

 

  나의 세계와

  맞은편의 세계가 연결되기 위해

  우리는 서가 한가운데에 꽂힌

  가장 아름다운 책의 제목을 빼어 들어야 했지

 

  그대와 나의 흰 눈송이들이

  아주 오랜 전생과 후생을 흘러와

  창밖의 지상에서

  마주쳤을 때

 

  저 너머의 세계에서

  아무 의미 없는 문학의 이름들이 발밑으로 툭,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유리창에 와 부딪치던 긴 밤

  먼 별의 거침없는 흰 조각,

  조각들처럼

      -전문-

 

 

  해설> 한 문장: 이 시의 주요 공간은 도서관의 서가이다. 이곳에서 주체는 고독에 침잠된 존재이다. 밤의 서가에서 그는 책들 사이를 서성거리고 있다. 그곳에서 새로운 세계를 마주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누군가 이쪽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이 원하는 책의 제목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음을 느"끼는 것을 통해서 새로운 세계와의 마주함에 대해 감각하게 된다. "그건 어떤 이야기의 시작이었을까"라는 의문은 고독의 세계가 그 세계로 마주 오는 누군가의 어루만짐에 의해서 변화를 겪게 될 것임을 직감하는 주체의 감각에 의해 던져진 것이다. 주체로 다가오는 타자는 "나의  세계와/ 맞은편의 세계가 연결되기 위해/ 우리는 서가 한가운데에 꽂힌/ 가장 아름다운 책의 제목을 빼어 들어야 했"다는 진술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서로 감응하면서 마주하게 된다.

  가장 아름다운 책의 제목이 무엇인지 주체는 알려주지 않지만 우리는 그 제목이 주체와 타자의 사랑을 수식하는 문장일 것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 책을 통해 둘은 서로를 마주하고 어루만진다. 동시에 둘은 서로의 현존을 감지한다. 여기서 우리는 낭시가 사랑에 대해서 논하며 어루만짐에 대해 강조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낭시는 "어루만짐은 사랑에서 중요한 것이 상대의 현존임을, 그의 감촉임을, 그리고 어떻게 보면 그것 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보여주는 행위"(장 뤽 낭시, 『신 정의 아름다움』, 갈무리, 2012, 134쪽)라고 말한 바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가장 아름다운 책의 제목을 뺴어" 드는 행위가 바로 어루만짐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 시 28-29/ 론 145-146) (김학중/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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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누군가를 위한 문장』에서/ 2022. 3. 25. <시산맥사> 펴냄   

  * 허민/ 1983년 강원 양구 출생, 2015년 웹진『시인광장』 제4회 신인상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