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함제미인/ 정영숙

검지 정숙자 2022. 3. 29. 01:21

 

    함제미인

 

    정영숙

 

 

  매화 지는 밤

  고월孤月로 떴습니다

 

  당신이 다니시는 고샅길

  비 오면 허리까지 차는 골가실 냇물

  밤 이슥토록 푸른 대숲 비추는

 

  매화꽃 흩날리는

  타다 만 비파 줄로 남았습니다

  

  달 밝은 밤, 맑은 술 한 잔에

  행여 그대 긴 손가락 울릴까

  험한 재 굽이굽이 힘들 때

  혹여 둥근 음에 쉬어 가라시며

 

  청아한 피리 소리

  휘영청 고월에 걸리는 밤

  

  천년 벼루 속 푸른 달빛 찍어 그리는

  흰 화선지 속

  함제미인含睇美人이고 싶습니다*

     -전문-

 

 

  * 자하紫霞 신위申緯가 황산黃山 김유근金逌根에게 보낸 시 「수선화」 둘째 수에서, '함제미인含睇美人'은 '눈길 그윽한 미인, 수선화'를 뜻하며, 매화 지자 수선화 피기를 기다리는, 친구를 만나길 염원하는 시.

 

  해설> 한 문장: 시는 일종의 척독尺牘이다. 시간과 시간이 서로의 마음을 나누는 곁눈질의 서간문이다. 마음을 드러내되 다 드러내지 않으니, 시를 읽는 마음이 때로 애달프다. 간절함은 두말할 나위없다. 짧은 편지 형식의 글에 시의 진심을 담고, 함축된 메시지를 전하다 보니, 그 간절함 또한 배가 된다. 정영숙 시인의 이번 시집 또한 이와 닮았다. 그녀가 시인의 말을 통해 전한 함제미인含睇美人. 눈길 고운 미인이라는 뜻으로, 수선화가 언제 고운 자태를 드러낼 것인가의 의미를 담는다. 이왕 말을 꺼냈으니, 함제미인과 관련한 황산黃山 김유근金逌根과 자하紫霞 신위의 이야기를 마냥 지나칠 수 없다. 황산이 신위에게 보낸 편지의 서두는 다음과 같다. "매화의 일은 이미 지나가고, 수선화는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너무 적막하여 마음을 가누기 어려운 아침입니다(梅事己闌, 水仙未花, 正是寂寥難遺之辰.)" 뜻을 풀면 분매盆梅의 매화꽃은 이미 시들고, 구근에서 올라온 수반 위 수선화 꽃대는 아직 꽃을 피우지 않았다는 말이다. 어디에도 마음의 적을 두지 못한 황산의 애달픈 그리움과 갈망이 그대로 전해진다. 그런 와중에 황산은 문득 신위가 생각났음을 고백한다. 김소월 시의 한 구절처럼 "그립다/ 말을 할까/ 하니 그리워"(「가는 길」)진 셈이다. 이에 신위는 한 수 더 떠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수선화'와 관련한 시 세 수를 황산에게 지어 보낸다. 이 중 둘째 수의 내용은 이렇다. 얄미운 매화가 피리 연주 재촉터니, 고운 꽃잎 떨어져 푸른 이끼 점찍는다. 봄바람 살랑살랑 물결은 초록인데, 눈길 고운 미인은 오는가 안 오는가?(無賴梅花 笛催, 玉英顚倒點靑笞. 東風吹縐水波錄, 含睇美人不來.)" 신위는 황산에게 매화는 가고 수선화는 오지 않은 주춤한 정경 속에서, 수선화가 필 때 만나자는 약속을 전한다. 함제미인에 대한 옛문헌의 에피소드는 황산과 신위의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정영숙 시인의 이번 시집을 대변하는 중요한 키워드이자 약속의 상징이기도 하다. (p. 시 96-97/ 론 115-116) (김정배/ 문학평론가, 원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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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나의 키스를 누가 훔쳐 갔을까』에서/ 2022. 2. 28. <문학의전당> 펴냄   

  * 정영숙/ 1947년 대구 출생, 1993년 작품 활동 시작, 시집『볼레로, 장미빛 문장』『황금서랍 읽는 법』『하늘새』등, 활판시선집『아무르, 완전한 사랑』, 산문집『여자가 행복해지는 그림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