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악마의 생활난/ 여태천

검지 정숙자 2022. 3. 29. 02:16

 

    악마의 생활난

 

    여태천

 

 

  반드시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해결되지 않지만 해야 하는 일들

 

  치매 걸린 노인에게 자식은 하루에 두 번 전화했다.

  잘 주무셨어요?

  노인은 잠결인 듯 꿈속인 듯 대답했다.

  니가 누고?

  끼니 거르지 마세요.

 

  속사정을 모르면 바깥은 언제나 봄날이지만

  알고 보면 깜깜한 터널 속인 것처럼

 

  자신이 누군지 아는 사람이었다면 자식은 더 자주 전화를 했을지 모른다. 저녁 무렵 자식은 하루의 삶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노인에게 전화를 또 한다. 뭘 기대하고 하는 일과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하는 일

  기다림과 인내가 그 사이에 있을 뿐

 

  저녁은 드셨어요?

  잘 안 들린다.

 

  응답을 듣기 위해 누구는 피를 흘리며 전 생애를 떠돌고 누구는 피를 묻히고 악마가 되기로 결심하지만 대답을 듣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다.

  대답 없는 너와 다르지 않은 너

  너희가 세상에 가득할지어니.

  목소리 좀 크게 해라!

  당최 알아들을 수 없다.

 

  아침에 누군지 되물었던 목소리를 알아챘으니 다행이라고 잠시 자식은 생각한다. 언제나 다행은 불행의 여러 경우 중 하나. 노인은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성화다. 자식은 아무리 크게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노인이 원망스럽다. 언제고 세상이 답답하지 않은 적 있었을까. 노인도 자식도 저녁이면 악마가 된다. 누구나 일 분이면 악마가 된다. 우리의 악마는 귀가 멀고 얼굴을 붉히며 살아있다.

 

  왜 그리 못 알아들으셔요! 

  뭐라고!

 

  자식의 목소리는 노인의 목소리보다 더 커져 전화기를 집어삼킨다.

  자상한 목소리와 아름다운 시간은 수화기로 빨려들어가

  윙윙거리다 삐삐거리다 덜컥거린다.

 

  알았어요!

  이젠 그만 쉬세요.

 

  악마가 조용히 눈물을 흘린다.

  깜깜해서 알아볼 수 없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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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파 MUNPA』 2021-겨울(62)호 <시마당> 에서

  * 여태천/ 2000년『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감히 슬프지 않을 수있겠습니까『저렇게 오렌지는 익어가고』『스윙』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