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말복 외 1편/ 윤정구

검지 정숙자 2022. 3. 17. 03:14

 

    말복 외 1편

 

    윤정구

 

 

  모시등걸 입고

  부용婦容 앞에 서니

  영락없는 아버지라고

  팔순의 어머니가 웃으신다

 

  등나무 밑 평상에는

  굽은 등 누이셨던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마흔일곱 아버지가

  처음 내 울음소리를 듣고

  바를 정자 이름을 지어 주신 등나무 그늘에

  다시 마흔일곱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장 받아라, 

  아버지는 장군도 잘 부르셨지만 

  내게 멍군 받기를 더 좋아하셨다

  세상에 내게 지고 좋아하던 분은

  사실 아버지밖에 없었다

 

  너는 과연 똑바로 살았느냐,

  떳떳이 질 줄도 알았느냐,

  낮은 기침소리에 고쳐 앉는다

 

  더웠습니다, 아버지

  바르고 말고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허둥거리며 달려왔을 뿐입니다

 

  곁의 부용이 고개를 젓는다

  맞다, 생각할 때가 되었다

  가을이 멀지 않았다

       -전문-

 

    -------

     초대

 

 

  두어 해 전부터

  삼화령三花領 기슭

  라파엘의 집 맞은편에 삽니다

  사천泗川 선천宣川 다 지나

  홍어찜 구수하고 선지우거지국 잘 끓이는 이모네와

  열무김치 상큼한 누님손국수집이 있는

  학고재學古齋 골목입니다

  병합蚌蛤이라는 묘한 이름의 백제 요릿집도 있지만

  아직 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가끔 들르는 Volga강가에는

  나팔꽃 수세미 화초호박이

  사이좋게 비닐 끈을 타고 올라

  각각의 예쁜 새끼들을 치고 늙어 갔습니다

  황가방黃家房 낡은 책방 옆

  망치와 끌이라는 깔깔한 목공소에는

  소리를 모으는 손이란

  흑백사진 한 점 걸렸습니다

  오수미보다 더 매혹적인 흑인소년 모델 SAM

  죽어서도 깊은 눈으로 손님을 끌고 있습니다

  까만 선글라스를 쓴 중만이 배꼽은

  아직 섹시합니다

  침상 위엔 하와이에서 온 소라 껍데기 하나

  귀에 대면 남태평양 파도소리

  하얗게 밀려오며 수근댑니다

  그래서 담양산 대나무발을 달았습니다

  커다란 한지부채도 준비했습니다

  아직 아무 글자도 써 넣지 않았습니다

  골목 안 대신상회에서는

  실용신안 자동 먹갈이를 팔고 있습니다

  이만 삼천 원입니다 이만 원까지 드립니다

  안국安國입니다 한번 들러 주십시오

  내리시면 쉽게 닿을 수 있습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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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선집 『봄 여름 가을 겨울, 일편단심』에서/ 2022. 1. 31. <문예바다> 펴냄   

  * 윤정구/ 경기 평택 출생, 1994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눈 속의 푸른 풀밭』『햇빛의 길을 보았니』『쥐똥나무가 좋아졌다』『사과 속의 달빛 여우』『한 뼘이라는 적멸』, 산문집『한국 현대 시인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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