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복 외 1편
윤정구
모시등걸 입고
부용婦容 앞에 서니
영락없는 아버지라고
팔순의 어머니가 웃으신다
등나무 밑 평상에는
굽은 등 누이셨던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다
마흔일곱 아버지가
처음 내 울음소리를 듣고
바를 정正자 이름을 지어 주신 등나무 그늘에
다시 마흔일곱의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장 받아라,
아버지는 장군도 잘 부르셨지만
내게 멍군 받기를 더 좋아하셨다
세상에 내게 지고 좋아하던 분은
사실 아버지밖에 없었다
너는 과연 똑바로 살았느냐,
떳떳이 질 줄도 알았느냐,
낮은 기침소리에 고쳐 앉는다
더웠습니다, 아버지
바르고 말고는 생각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허둥거리며 달려왔을 뿐입니다
곁의 부용이 고개를 젓는다
맞다, 생각할 때가 되었다
가을이 멀지 않았다
-전문-
-------
초대
두어 해 전부터
삼화령三花領 기슭
라파엘의 집 맞은편에 삽니다
사천泗川 선천宣川 다 지나
홍어찜 구수하고 선지우거지국 잘 끓이는 이모네와
열무김치 상큼한 누님손국수집이 있는
학고재學古齋 골목입니다
병합蚌蛤이라는 묘한 이름의 백제 요릿집도 있지만
아직 가 보지는 못했습니다
가끔 들르는 Volga강가에는
나팔꽃 수세미 화초호박이
사이좋게 비닐 끈을 타고 올라
각각의 예쁜 새끼들을 치고 늙어 갔습니다
황가방黃家房 낡은 책방 옆
망치와 끌이라는 깔깔한 목공소에는
소리를 모으는 손이란
흑백사진 한 점 걸렸습니다
오수미보다 더 매혹적인 흑인소년 모델 SAM
죽어서도 깊은 눈으로 손님을 끌고 있습니다
까만 선글라스를 쓴 중만이 배꼽은
아직 섹시합니다
침상 위엔 하와이에서 온 소라 껍데기 하나
귀에 대면 남태평양 파도소리
하얗게 밀려오며 수근댑니다
그래서 담양산 대나무발을 달았습니다
커다란 한지부채도 준비했습니다
아직 아무 글자도 써 넣지 않았습니다
골목 안 대신상회에서는
실용신안 자동 먹갈이를 팔고 있습니다
이만 삼천 원입니다 이만 원까지 드립니다
안국安國입니다 한번 들러 주십시오
내리시면 쉽게 닿을 수 있습니다
-전문-
-----------------
* 시선집 『봄 여름 가을 겨울, 일편단심』에서/ 2022. 1. 31. <문예바다> 펴냄
* 윤정구/ 경기 평택 출생, 1994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눈 속의 푸른 풀밭』『햇빛의 길을 보았니』『쥐똥나무가 좋아졌다』『사과 속의 달빛 여우』『한 뼘이라는 적멸』, 산문집『한국 현대 시인을 찾아서』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벽시계 외 1편/ 이원로 (0) | 2022.03.22 |
|---|---|
| 경기자/ 이원로 (0) | 2022.03.22 |
| 유리시경(流離詩境)/ 윤정구 (0) | 2022.03.17 |
| 산 첩첩 강 분분 외 1편/ 김승종 (0) | 2022.03.16 |
| 쇠똥 진흙창/ 김승종 (0) | 2022.03.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