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유리시경(流離詩境)/ 윤정구

검지 정숙자 2022. 3. 17. 02:07

 

    유리시경流離詩境

     - 자하紫霞 신위申緯는 시를 향한 맑고 고요한 마음의 지극한 경지를 유리시경이라 불렀다. 시서화詩書畵에 취한 그의 마음을 훔쳐보는 감나무가 있었다.

 

     윤정구

 

 

  바보 먹감나무가 말없이 담장 너머로

  자하紫霞 선생의 붓글씨 쓰는 것

  묵죽墨竹 치는 것을 얼빠진 듯 넘겨다본다

  붓끝을 감추는 역입逆入

  마디마다 멈추어 획을 살리는 삼절三折

  그리는 게 아니라 투욱투두툭! 가지 쳐 가는 댓잎들을

  눈썰미 있게 들여다본다

 

  내게 붓이 있으면

  화선지가 있었으면

  아아, 내게 팔과 손이 있었으면

  먹감나무 그렇게 절망하면서도

  틈틈이 자하 선생 글씨와 그림을 따라

  마음속으로 긋고 또 긋더니

  남몰래 흐뭇한 웃음도 짓더니

 

  묵죽과 붓글씨를 뛰어넘은

  막감나무의 유리시경

  마침내 단아한 문갑文匣이 되었다

      -전문-

 

  서녘 하늘에 뜬 별을 바라보며>한 문장: 「유리시경流離詩境」은 "자하紫霞 신위申緯(조선 후기의 시인, 문신1769~1847, 78세)는 시를 향한 맑고 고요한 마음의 지극한 경지를 유리시경이라 불렀다. 시서화詩書畵에 취한 그의 마음을 훔쳐보는 감나무가 있었다"고 부제를 붙인 근작시이다. 추상미술의 대가들이 놀라는 먹감나무 문장의 추상적인 미감은 두말할 나위 없이 뛰어나다. 자하 선생의 시를 읽고 글씨와 그림에 놀라는 자하동의 감나무를 통하여 예술의 지난至難함을 뚫고 성취하는 기쁨을 노래한 것인데, '바보 먹감나무'로 시작하여 우직해야 참고 견디며, 마침내는 이루고 만다는 것을 화가가 나서지 않고 시종일관 의인화된 먹감나무를 통하여 그럴 수 있어, 속으로 기뻤던 작품이다. (p. 시 110-111/ 론 123-124)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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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선집 『봄 여름 가을 겨울, 일편단심』에서/ 2022. 1. 31. <문예바다> 펴냄   

  * 윤정구/ 경기 평택 출생, 1994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눈 속의 푸른 풀밭』『햇빛의 길을 보았니』『쥐똥나무가 좋아졌다』『사과 속의 달빛 여우』『한 뼘이라는 적멸』, 산문집『한국 현대 시인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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