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백과사전 외 1편
박봉준
동성황회 쌀집
우리 아버지 치부책에 외상값 올릴 때는
외상값뿐만 아니라
손님과 주고받은 말의 핵심도 적습니다
빛바랜 사족의 글귀가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싶어도
외상값 시비가 생기면
녹음기 같은 깨알 기록으로
거뜬히 해결하시던
그 노하우
당장 생각날 것 같아도
세월 지나면 오래된 필름의 스크래치처럼
흠집이 나는 기억들
생전의 아버지보다 세 살은 더 많은 내가
이제야 그 한 수를 배웁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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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까짓 거, 참
한날한시에 죽지 못한다면
남은 사람들을 위해서 남자가 먼저 가야 한다는
아내의 논리가 섭섭하기는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런 아내가 딸네 집에 가서 며칠째 오지 않고 잘 살고 있느냐고 전화했기에 아주 잘 살고 있다고 무심코 대답했더니 그럼 어디 한번 잘 살아 보라고 한다
그까짓 거 전화 한 통화 때리면 배달의 민족 달려오고 핸드폰만 있으면 온종일 깨가 쏟아지는 세상
그까짓 거 홀아비 친구들도 혼자서 사는데 왜 못 살겠느냐마는 생각해 보니 내가 한 번쯤 그 친구들이 꾹꾹 눈물을 가둬놓은 호수의 바닥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다
며칠 딸네 집에 간 아내를 기다리는
아지랑이 같은 봄날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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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단 한 번을 위한 변명』에서/ 2022. 2. 25. <상상인> 펴냄
* 박봉준/ 강원 고성 출생, 2004년『시와비평』신인상 수상, 시집『입술에 먼저 붙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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