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다 퍼주고도 남은/ 신덕룡

검지 정숙자 2022. 3. 4. 02:42

 

    다 퍼주고도 남은

 

    신덕룡

 

 

  지난봄에 과일나무 묘목

  열 그루를 심었다

  텃밭의 일거리나 좀 줄여보자는 심산이었으니

  열매를 얻겠다는 생각은 언감생심,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저 오며 가며 새잎 돋는 것과

  수줍게 피어난 꽃들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만으로도 뿌듯한 일이었다

 

  봄이 지나면서

  꽃을 다 떨궈낸 자리

  사과나무 딱 한군데서 손톱만 한 열매가 달렸는데

  온 세상의 숨결들이 다 그리로 모여들었는지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었다

  그 곁을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숨도 죽이고 기도하듯 지나다녔다

 

  자꾸 쳐다보면

  내 눈길 때문에 동티가 나지 않을까

  기웃거리는 눈길을 걱정 한끝에 붙들어 매고

  한여름을 모른 체하며 보냈다

  그 마음을 알아챈 듯

  가을이 되자 무럭무럭 어른 주먹보다 커졌는데

 

  아뿔싸, 온갖 벌레들이 파먹고 남은

  반쪽짜리였다

  따서 맛을 보자는 건 아니었지만

  느닷없는 행운은 바람이나 거품 같은 게 아니냐고

  예수가 허기진 이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다 나눠주고도 넉넉하게 남았다고 하듯

  헛농사는 아니라고 위로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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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딩아돌하』 2021-가을(60)호 <신작시> 에서

   * 신덕룡/ 경기 양평 출생, 1985『현대문학』으로 평론 부문 & 2002년 『시와시학』으로 시 부문 등단, 시집『소리의 감옥』『하멜서신』『다섯 손가락이 남습니다』, 저서『환경위기와 생태학적 상상력』『풍경과 시선』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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