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퍼주고도 남은
신덕룡
지난봄에 과일나무 묘목
열 그루를 심었다
텃밭의 일거리나 좀 줄여보자는 심산이었으니
열매를 얻겠다는 생각은 언감생심,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저 오며 가며 새잎 돋는 것과
수줍게 피어난 꽃들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만으로도 뿌듯한 일이었다
봄이 지나면서
꽃을 다 떨궈낸 자리
사과나무 딱 한군데서 손톱만 한 열매가 달렸는데
온 세상의 숨결들이 다 그리로 모여들었는지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었다
그 곁을 나는, 발소리를 죽이고
숨도 죽이고 기도하듯 지나다녔다
자꾸 쳐다보면
내 눈길 때문에 동티가 나지 않을까
기웃거리는 눈길을 걱정 한끝에 붙들어 매고
한여름을 모른 체하며 보냈다
그 마음을 알아챈 듯
가을이 되자 무럭무럭 어른 주먹보다 커졌는데
아뿔싸, 온갖 벌레들이 파먹고 남은
반쪽짜리였다
따서 맛을 보자는 건 아니었지만
느닷없는 행운은 바람이나 거품 같은 게 아니냐고
예수가 허기진 이들에게 떡과 물고기를 다 나눠주고도 넉넉하게 남았다고 하듯
헛농사는 아니라고 위로해보는 것이다
--------------
* 『딩아돌하』 2021-가을(60)호 <신작시> 에서
* 신덕룡/ 경기 양평 출생, 1985년『현대문학』으로 평론 부문 & 2002년 『시와시학』으로 시 부문 등단, 시집『소리의 감옥』『하멜서신』『다섯 손가락이 남습니다』, 저서『환경위기와 생태학적 상상력』『풍경과 시선』등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먹다 남은 고기/ 정다운 (0) | 2022.03.05 |
|---|---|
| 홈/ 최유리 (0) | 2022.03.04 |
| 마지막 여름/ 이길상 (0) | 2022.03.03 |
| 밤입니다/ 최서진 (0) | 2022.03.03 |
| 오원(五園)을 재생하다/ 이희정 (0) | 2022.03.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