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비로소/ 이서화

검지 정숙자 2021. 12. 19. 01:20

 

    비로소

 

    이서화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라는

  글귀를 읽을 때마다

  반드시 도달해야 할 그 어떤 곳이 있을 것 같다

  그 비로소는 어떤 곳이며 어느 정도의 거리인가

  비로소까지 도달하려면

  어떤 일과 현상, 말미암을 지나고

  또 오랜 기다림 끝에 도착할 것인가

  팽팽하게 당겨졌던 고무줄이

  저의 한계를 놓아버린 그곳

  싱거운 개울이 기어이 만나고야 마는

  짠물의 그 어리둥절한 곳일까

  비로소는 지도도 없고

  물어물어 갈 수도 없는 그런 방향 같은 곳일까

  우리는 흘러가는 중이어서

  알고 보면 모두 비로소,

  그곳 비로소에 이미 와 있거나

  무심히 지나쳤던 봄꽃,

  그 봄꽃이 자라 한 알의 사과 속 벌레가 되고

  풀숲에 버린 한 알의 사과는 아니었을까

  비로소 사람을 거치거나

  사람을 잃거나 했던

  그 비로소를 만날 때마다 들었던

  아득함의 위안을

  또 떠올리는 것이다

  벌레가 살아서 내게 기어 온다

      -전문-

 

  해설> 한 문장: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의 『옛날에 대하여』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네델란드 화가인 헤릿 다우(Gerrit Doe, 1613-1675, 62세)의 괴벽에 관한 것이다. 그는 아버지에게 처음 판화를 배웠고, 훗날 렘브란트의 제자가 되었다. 독신으로 여생을 보낸 그는 여러 가지 괴벽이 있었다고 한다. 키냐르의 말에 따르면 그는 아마 세상에서 가장 느린 화가일 것이다. 그의 괴벽 중에는, 자기 작업실에 먼지가 내려 앉기를 기다리는 버릇도 있었는데 그렇게 태이블에 먼지가 뽀얗게 쌓이고 나서야 비로소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키냐르는 이야기를 정리하며 이런 질문들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그는 허송세월만 보내는 것 같지만, 사실은 다음번에 그리고자 하는 그림이 자신의 내면에서 무르익기를 기다렸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먼지를 날리는 어떤 움직임도 잦아들기를 기다린 것은 아닐까?1)

  기다림은 모든 예술에 있어 숙명과도 같다. 회화도 그러하지만, 시도 마찬가지다. '시인'은 현실의 세계와 시의 세계 사이에 두 발을 걸치고 서 있다. 그 이름을 짊어지는 순간부터 경계에 두 발을 내미는 것이다. 그곳에 서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고, 그것들로부터 시작(始作/詩作)된다. (시 p. 14-15/ 론 125-126) (정재훈/ 문학평론가)    

 

  1) 파스칼 키냐르, 송의경 역, 『옛날에 대하여』, 문학과지성사, 2010, 199~2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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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날씨 하나를 샀다』에서 / 2021. 11. 22. <여우난골> 펴냄

 * 이서화/  1960년 강원 영월 출생, 2008년『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 시집 『굴절을 읽다』 『낮달이 허락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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