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별다방 1호점/ 홍미자

검지 정숙자 2021. 12. 20. 23:55

 

    별다방 1호점

 

    홍미자

 

 

  별다방에서 콜드브루를 마셨지

  별들이 슬어 놓은 푸른 눈동자들이

  권태로운 눈꺼풀에 매달려 가물거리는 오후

  차갑고 어두운 바닷속을 헤엄쳐 가는

  흰고래 모비딕을 만날 수 있을까

  물류창고 안 사각지대에 기대어

  멈춰 선 지하철 스크린도어 밖에서

  컵라면으로 한 끼를 때운 스무 살 그에게

  바다는 너무 멀리 있었지

  태평양을 건너 시애틀에 간 그녀가

  버킷리스트에서 꺼낸 별다방 1호점

  붉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허기의 목록들을 고백할 때

  세이렌의 노랫소리를 들은 것도 같아

  자판기 밀크커피 한 잔이 채워지기도 전에

  기차는 말없이 들어서고 있었지

  하청받은 시간은 빽빽했으므로

  겹겹이 어깨 너머로 출입문이 닫히듯

  그는 어디로도 떠날 수 없었지

  시차를 거슬러 그녀가 날아오는 동안

  골목마다 굶주린 저녁이 몰려왔지

      -전문-

 

  해설> 한 문장: "물류창고 안 사각지대에 기대어/ 멈춰 선 지하철 스크린도어 밖에서/ 컵라면으로 한 끼를 때운 스무 살" 비정규직 노동자는 "별다방에서 콜드브루를 마"시곤 한다. 그런데 놀라지 말 것! "별다방"이란, 음료를 자동으로 뽑아서 마실 수 있는 자판기가 설치된 곳으로, 노동환경이 열악한 처지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들이 그나마 그곳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흡사 쉼터다. 분명, 이 쉼터는 힘든 노동을 편안히 쉴 수 있는 그런 곳과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하청 노동자들은 이곳에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현재의 고된 노동 너머 도래할 미래의 삶, 즉 "허기의 목록들을 고백"한다. 그중 "태평양을 건너 시애틀에 간" 어떤 노동자는 아메리칸 드림 속에서 한국의 고된 현장 아래 "버킷리스트에서 꺼낸 별다방"에 얽힌 추억을 떠올리지만, 또 다른 노동자는 한국의 하청 노동의 냉엄한 현실 속에서 "별다방"의 자판기 밀크커피 한 잔이 채워지기도 전에" "말없이 들어서고 있"는 지하철의 여닫히는 출입문을 물끄러미 쳐다볼 수밖에 없다. "별다방"의 짧은 쉼 사이 심연에 존재하는 "흰고래 모비딕을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상상의 기대보다 "골목마다 굶주린 저녁이 몰려"오는 게 비껴갈 수 없는 그의 지극히 리얼한 삶이다./ 이렇게 그들의 삶은 이어지고, 도돌이표가 난무한 악보처럼 변화와 약진 및 비약이 허락되지 않는, 심지어 일상의 숱한 "소문과 추문들 사이"에 갇힌 채, 그들은 의도하지 않은 삶의 은둔자로 자칫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 (시 p. 24/ 론 1-112) (고명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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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혼잣말이 저 혼자』에서 / 2021. 9. 10. <파란> 펴냄

 * 홍미자/ 1960년 충남 대전 출생, 2018년『내일을 여는작가』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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