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의 환幻
이재훈
부러진 돌부리에 채인다
굴러다니는 돌이 아니라
올곧게 서 있다가, 부러진 돌
창과 칼 혹은 바람이
돌의 몸을 반 동강 냈을 것이다
사방이 어둠이었고
나를 길에 내던졌던 사람들의 눈빛만
어둠 속에서 반짝하던 밤들이었을 때
발바닥 돌덩이가 내 존재를 떠받칠 때가 있다
돌이 내 집을 떠받치고,
아버지의 약속을 떠받칠 때
돌 위에 피의 흔적이 있다
돌은 깨져도 죽지 않는다
돌은 썩어갈 육체를 갖고 있지 않아
언제나 채이고 밟히고 놀아난다
돌에 의해 소멸한 것과 태어난 자리가 한 몸이 되는
이 모든 찰나를 지켜본 돌
어둠 속에서 세상이 어지럽게 돌기 시작하면
나는 흔들거리는 운명을 본다
흔적 없이 왔다간
당신의 영혼에 몰래 깃들고 마는 돌
부처의 얼굴도 만들고, 예수의, 마리아의 몸도 만드는
성육신인 돌
영원을 살고 있는 길 위의 돌
돌로 만들어진 뭇사람 하나
그 무성한 골짜기의 돌
* 『시사사』, 2012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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