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홀한 침범
-사임 수틴
김상미
왜 그랬는지 몰라, 그에게 필이 꽂혀 버렸어, 언제나 해진 외투주머니에 손을 넣고 구부정하게 도심을 기웃거리는, 찢어지게 가난한 헌옷 수선공의 열 번째 아들, 바로 일 분 전의 일이라도 지나간 것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친구라곤 오로지 피범벅이 되어 쓰러지는 권투장의 아우성과 고함소리뿐, 외롭고 퉁명스럽고 거칠고 지저분한, 늘 허기진 위통에 시달리는 파리한 얼굴의 남자, 동시대 작품들엔 아무런 흥미도 없고, 플랑드르 대가들의 그림이나 쿠르베, 샤르댕, 렘브란트 그림 앞에선 무아경이 되는, 밤새 지붕 틈새로 새어든 빛 같은 그에게 나도 모르게 필이 꽂혀 버렸어, 아마도 그가 그린 붉은 색 때문일 거야, 화폭을 가득 채운 강렬하면서도 비극적인 붉은 색, 나는 그보다 더 칠흑 같은 빛을 보지 못했어, 그보다 더 크게 울부짖는 열림을 보지 못했어, 내 옆의 누군가가 갑자기 나를 움켜쥐는 뜨거운 손 같은, 불꽃으로 달려드는 나방처럼 나도 모르게 그에게 필이 꽂혀 버렸어, 그건 산 자들이 죽은 자들의 왕국으로 침범해 그들의 영혼을 황홀하게 만지는 것과 같았어. 한 번도 살아보지 못한 아주 오래된 아름다운 집들의 창문이 동시에 와장창 깨지는 듯한!
*『문학의 오늘』2012-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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