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시집 · 이 화려한 침묵

배추밭/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2. 5. 21. 00:50

 

 

    배추밭

 

     정숙자

 

 

  생명의 역사는 사랑의 역사

  배추밭에 앉아서 배추벌레를 잡는다. 배추밭 가장자리 호박

꽃 속엔 벌이 몇 마리씩 들어 있고, 서정시처럼 투명한 이슬에

발이 젖는다

 

  이 맑은 아침

  내 손에 잡힌 벌레들 또한 얼마나 애틋한 사랑의 결과인 것이

냐? 아직 꽃이 떨어지지 않은 애호박, 벌들, 바라귀풀 한 잎도

사랑이 이어온 생명의 계보

 

  사랑을 통하지 않고는 어떤 생명도 탄생될 수 없는 자연의

미학을 깨닫고 경외하면서, 나는 이대로 배추벌레를 잡아야 하

는 것이냐? 나비들이 초조히 지켜보는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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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이 화려한 침묵』에서/ 1993. 4. 26. <명문당> 발행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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