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시집·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파란 피아노/ 정숙자

검지 정숙자 2012. 5. 12. 12:19

 

 

    파란 피아노

 

    정숙자

 

 

  길은 밤에 조율된다

  온종일 밟히고 긁혀 느슨해진 건반들

  깊고 달콤한 어둠에 안겨 아침을 복원한다

 

  (어느 날, 산책로에서

  발치에 떨어진 건반 몇 개를 봤다

  곰곰 응시하자 길바닥이 점점 투명해지며 끝없이 깔린

건반이 드러났다. 한 걸음 두 걸음 내디디는 걸음걸음 발

걸음마다 파란 옥타브가 바람을 탔다.)

 

  삶이란 이런 인가

  희극이란 이런 인가

  40억 년 거뜬히 넘긴 미러볼, 뭇 발자국 수용/응원하는

건반과 건반, 난데없이 끼는 삑사리,

 

  최저음 밟지 않고 돌아간 이 몇이나 될까

  길의 건반에는 규율 없으니

  ‘미’를 짚어도 ‘파'가 울리고 ‘시’를 원할 땐 피가 솟는다.

단 한 번 같은 음 내지도 않고, 어쩌다 ‘파’를 누르면 생뚱

맞은 ‘라’가 뜨기도 하고

 

  그 나 저 나 우리모두

       쓰러,

          쓰러, 걸음마 세운 마당도

    실족 없는 탄주를 위한 운명의 본선의 예습이었음

 

  사유재산 제1호 고독감, 쯤은

  빛의 암호를 푸는 눈인 걸

  맑고 따뜻한 밤의 위로가 있어

  매일매일 긴장과 탄력, 팽팽한 아침이 있어

    -『미네르바』2012-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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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에서/ 2017.6.26.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뿌리 깊은 달』『열매보다 강한 잎』등, 산문집『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