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피아노
정숙자
길은 밤에 조율된다
온종일 밟히고 긁혀 느슨해진 건반들
깊고 달콤한 어둠에 안겨 아침을 복원한다
(어느 날, 산책로에서
발치에 떨어진 건반 몇 개를 봤다
곰곰 응시하자 길바닥이 점점 투명해지며 끝없이 깔린
건반이 드러났다. 한 걸음 두 걸음 내디디는 걸음걸음 발
걸음마다 파란 옥타브가 바람을 탔다.)
삶이란 이런 물인가
희극이란 이런 결인가
40억 년 거뜬히 넘긴 미러볼, 뭇 발자국 수용/응원하는
건반과 건반, 난데없이 끼는 삑사리,
최저음 밟지 않고 돌아간 이 몇이나 될까
길의 건반에는 규율 없으니
‘미’를 짚어도 ‘파'가 울리고 ‘시’를 원할 땐 피가 솟는다.
단 한 번 같은 음 내지도 않고, 어쩌다 ‘파’를 누르면 생뚱
맞은 ‘라’가 뜨기도 하고
그 나 저 나 우리들 모두
쓰러지며,
쓰러지며, 걸음마 세운 마당도
실족 없는 탄주를 위한 운명의 본선의 예습이었음
사유재산 제1호 고독감, …쯤은
빛의 암호를 푸는 눈인 걸
맑고 따뜻한 밤의 위로가 있어
매일매일 긴장과 탄력, 팽팽한 아침이 있어
-『미네르바』2012-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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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에서/ 2017.6.26.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펴냄
* 정숙자/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1988년『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뿌리 깊은 달』『열매보다 강한 잎』등, 산문집『행복음자리표』『밝은음자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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