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최현식_ 말의 탈주, 사물의 변신(발췌)/ 음압병실에 들다 : 한윤희

검지 정숙자 2021. 5. 29. 14:08

 

    음압병실에 들다

 

    한윤희

 

 

  가벼운 말들은 모조리 삼켜버렸다고 고백해야 돼

  그래서 목구멍이 화끈거리는 거라고

 

  말하고 싶은 열망으로

  말을 꺼내지 못해 침방울이 뜨겁다는 이유로

  갇혔어 하얀 시트가 출렁거려

  가두면 가둘수록 갇히면 갇힐수록 출렁이는 방

  겨울 같은 벽에 걸린 자화상, 하얀 책상 하얀 종이

  기압 낮은 방, 너를 낳기 좋은

  하얀 천장이 뒤설렌다, 흰색은 그리기 좋은 색

 

  혀들의 뒷면, 누군가 깊게 베어 먹은 이파리를 씹는다

  잎 그늘에 모인 균들의 출렁임이라니

 

  흰 장갑이 내민 스테인리스 식판에 비친 얼굴이 자란다

  흰 용기 안에서 뒤척이며 몸을 키워가던 유산균

  밖으로 흘러나오는 걸쭉한 발소리, 춤이다

 

  이 방은 청정지역, 거꾸로 도는 헤파필터*의 날개 

  천장 작은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숨

  마스크로 뒤덮인 지붕 틈새로 서서히 스며든다

      -전문-

 

    * 헤파필터: 공기 중 미립자를 정화시키는 필터

 

    말의 탈주, 사물의 변신_한윤희의 신작시를 읽다(발췌) _ 최현식/ 문학평론가

  "음압병실"에 듦으로써 오히려 전면화된 존재의 고독과 위험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마음과 행동이 더욱 절실해질까. 시인은 무엇보다 "말하고 싶은 열망"을 앞세웠더랬다. 이것은 감옥 속의 언어를 해방하고 더불어 훼손된 심신을 치유하겠다는 뜨거운 기대와 모색의 다른 표현일 따름이다. 이를테면 "너를 낳기 좋은/ 하얀 천장이 뒤설렌다"에서 보듯이, 시인은 그 가능성을 온통 흰색으로 채색되어 더욱 텅 비어 보이는 "기압 낮은 방"에서 찾고 있다. 여기서 생산될 최후의 결과물로는 "흰색을 그리기 좋은 색"이라는 비유에서 얼추 짐작된다. "텅 빈 색"이라고 했으니, 모험적 시혼에 의해 제작, 구축될 "혀들의 뒷면"이 발화하는 특별난 언어의 장임은 틀림없어 보인다. (······) 이로써 한윤희의 신작시는 기존 형식과 구별되는 선과 면, 색깔과 형태의 발명이나 조작을 통해서만 불명료한 내적 정서의 온전한 표현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믿었던 추상미술의 원칙에 충실히 기대고 있음이 한결 분명하게 드러난다. (p. 시 119/ 론 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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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파』 2021-봄(59)호 <소시집/ 신작시/ 작품론>에서

   * 한윤희/ 2005년『문학시대』로 등단, 시집『물크러질 듯 물렁한』, 동인지『숨비소리』『채우지 못한』 외 다수

   * 최현식/ 199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평론집『말 속의 침묵』『시는 매일매일』『감응의 시학』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