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가니니 현상
이채민
불면은 계급도 없이 독재를 휘두릅니다
죽지 않고 죽음의 거리에서 온갖 선율을 듣습니다
열병처럼 부푼 밤거리
거리는 불빛으로 칠해진 야시장
죽음 뒤에도 생이 있습니까?
모든 일은 죽기 전에 해야 천정을 보고 웃을 수 있습니다
낮이나 밤이나 전설은 할 일이 많습니다
눈을 잃고 귀를 버리고 돌아온 날
젊은 휘파람이 한 묶음 따라왔습니다
하루 운세는 불타는 기둥이었습니다
이상한 회전문 속에 갇힌
울다가 웃는 궤적들
사이사이에서
특수 포장이 된 어둠이 벗어날 수 없다고 속삭입니다
악마를 만났습니다
여인의 창자로 만들어진 마지막 弦이 춤을 춥니다
그리고 모든 휘파람은 검은 연기가 되었습니다
불면의 값이 넘칩니다
-전문-
▶ "층계의 시간"의 지각 현상을 위하여(발췌) _홍용희/ 문학평론가
시간은 어떻게 감지될 수 있을까? 빛과 소리는 보고 듣는 눈과 귀의 감각 기관이 있지만 시간은 무엇으로 감각하는가?그렇다면 시간을 감각적으로 대상화할 수 있는 방법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불면"의 체험이다. "불면은 계급도 없이 독재를 휘"둘러 온몸을 민감한 시간 지각의 더듬이로 깨워낸다. 그래서 시간 속의 "울다가 웃는 궤적들"이 "특수 포장이" 되어 "속삭"이는 구체적 실체를 만들어낸다. "특수 포장"된 "울다가 웃는 궤적들"의 내용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 시인은 유영하는 시간 의식의 내면 풍경을 표백한다. "죽음의 거리에서 온갖 선율을" 듣거나 "부푼 밤거리"에서 "불빛으로 칠해진 야시장"을 보기도 하고 "젊은 휘파람이 한 묶음" 따라오는 것을 느낀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여인의 창자로 만들어진 마지막 弦이 춤을" 추고 "모든 휘파람은 검은 연기가" 되는 환상을 목격하기도 한다. 과거와 현재, 실재와 환상이 교섭하며 공존한다. 단일 계열의 직선적 시간과 변별되는 비선형적으로 개진되는 현재적 시간의 내면 풍경을 "불면"이 열어놓은 것이다. 현재 속에는 경험된 과거와 망각된 미래가 중층적인 지층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는 사라진 시간이 아니라 현재 속에 대답을 요구하는 내적 울림으로 현전하고 미래는 현재의 성격을 규정하는 계기로 작용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불면의 값"은 "불면"의 "독재"가 강제적으로 만든 시간 지각의 민감성이다. [p. 시 101/ 론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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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파』 2021-봄(59)호 <소시집/ 신작시/ 작품론>에서
* 이채민/ 2004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동백을 뒤적이다』『빛의 뿌리』『오답으로 출렁이는 저 무성함』등
* 홍용희/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저서 『김지하 문학연구』, 평론집『꽃과 어둠의 산조』『대지의 문법과 시적 상상』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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