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양문규_자연으로 가는 길/ 너 하나만 보고 싶었다 : 나태주

검지 정숙자 2021. 5. 25. 20:32

 

    자연으로 가는 길 · 25

 

    양문규

 

  자연으로 가는 길은 주경아독晝耕夜讀, 청경우독晴耕夜讀이다.

 

 

  올봄은 여느 봄날보다 보름 앞당겨 꽃들을 데려다주었습니다. 3월 초하루, 지난겨울 입었던 내복을 벗자마자 영춘화와 갈마가지나무와 매화가 꽃망울을 비추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를 따라 산수유가 노랗게 봄날을 열었습니다. 작은 연못에는 개구리가 한 무더기 알을 슬어 놓고 밤새 개굴개굴 울어댔습니다. 그러자 개나리와 참꽃이 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참꽃은 아주 오래전 해부터 식목일 전후 폈습니다. 그런데 올해는 3월 중순쯤 절정을 이뤘습니다. 그때 남쪽에서는 벚꽃이 만개했다고 들썩들썩했습니다. 진해 군항제 벚꽃 축제가 매년 4월 1일 열렸던 걸 보면 이 봄이 얼마나 빠르게 흘러가는지 알 수 있지요. 나도 모르게 '세상이 별일이네'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이 또 다른 꽃들이 쏜살같이 달려왔다가 떠나곤 했습니다. 아직 여름은 멀리 있는데 어쩌자고 산천은 초여름같이 푸르러져 있습니다.

  지난 4월 9일 아버님을 모시고 공주 풀꽃문학관을 다녀왔습니다. 영동에서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얼마 만의 여행인지 모릅니다. 엄니도 같이 갔으면 좋았을 텐데 형편이 그렇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 여행한 게 언제인가 들춰보니 2015년 4월 7일 경주 보문단지를 찾았을 때가 마지막인 거 같습니다. 그 여행은 서울 누님의 권유로 가게 되었는데요. 엄니는 여기도 벚꽃이 곧 필 텐데 그 먼 데까지 가냐며 반대가 컸습니다. 자신의 몸이 아파 오랫동안 차 타기가 엄두가 나지 않는 것도 있겠지만 자식 고생시킨다고 그러는 걸 왜 모르겠는지요. 그 이후 부모님을 모시고 서울과 대전을 수십 차례 다녀왔지만 그건 순전히 병원 치료차 간 것이라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니 경주 벚꽃 구경 갔을 때 누님이 찍어준 사진을 가끔 꺼내 보면서 "이날이 아버지 · 엄니 봄날이요." 하며 함께 웃었습니다.

 

  맑은 날은 먼 곳이 잘 보이고

  흐린 날은 기적소리가 잘 들렸다

 

  하지만 나는 어떤 날에도

  너 하나만 보고 싶었다.

    -전문, 나태주 「외로움」 

 

  지난해 계간 『시에』에 나태주 시인의 신작시 80편을 네 차례 나누어 실었습니다. 연재가 끝나고 여기에 10여 편의 시를 보태어 올봄에 『너 하나만 보고 싶었다』를 출간했습니다. 시집 제목을 어떻게 지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선생님이 제시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비롯한 몇 개의 시집 제목이 추천되었지만 여러 사람의 의견을 종합해 『너 하나만 보고 싶었다』로 정했습니다.

  이 시는 코로나19의 엄중한 사회적 거리두기 속에서도 긍정적 삶의 태도를 견지합니다. 그러므로 "맑은 날은 먼 곳이 잘 보이고/ 흐린 날은 기적 소리가 잘 들"립니다. 따라서 "어떤 날에도" 일기와 상관없이 "너 하나만 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때 '너'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내포한 절대적 대상이면서 친구며 연인입니다.

 

  아무리 눈을 감고 생각해봐도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르질 않는다

 

  정말로 내가 힘들고 괴로울 때

  문득 찾아가 이야기할

  바로 그 한 사람

 

  마음에 가득한 짐짝들

  내려놓기도 하고 그것들

  잠시라도 맡아줄 한 사람

 

  네가 그 사람이

  되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너에게 그 한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문, 나태주 「한 사람」 

 

  아버님과 풀꽃문학관을 찾아가는 도중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만 내비게이션이 일러주는 빠른 길을 놓쳤습니다. 유성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국도를 타고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님은 차가 지나가는 곳마다 속속 알고 있었습니다. 국립대전현충원을 지날 때는 저기는 누가 묻혀 있고 하면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얼마를 또 지나 동학사 안내 팻말이 보이자 "니 엄마랑 저기도 여러 번 갔다."며 옛 추억을 상기하듯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고속도로 타지 않고 국도로 가는 게 오히려 잘 되었다 내심 좋아했습니다.

  살아가면서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부모님을 찾았던 것 같습니다. 물론 터놓고 이야기하지 못한 것들도 많았지만 부모님을 뵙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해결된 듯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부모님의 "마음에 가득한 짐짝들/ 내려놓기도 하고 그것들/ 잠시라도 맡아"본 적 있는가 반문할 때마다 부끄럽기만 합니다.

  지난해는 코로나19 여파로 어버이날을 비롯해 부모님 생신과 한가위 명절과 설 명절에도 한 가족이 다 모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부모님 마음이 어찌하겠는지요. 그런데 얼마 전에 코로나19 예방 백신 접종을 하고부터는 얼굴이 한결 밝아졌습니다. 그러면서 오는 어버이날은 온 가족이 한데 모일 수 있다는 믿음도 갖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자식과 손녀, 손자 때문에 "내가 있어/ 하루해가 정답고 편안하고/ 세상이 다시 한번 따뜻해진" 것과 같겠지요. 그리고 "마음은 젊어지다 못해/ 어려지기까지" 하고요. "그래서 고마워 너에게 고마워." 날마다 "너하나만 보고 싶었다"입니다.

  나태주 시인의 『너 하나만 보고 싶었다』를  펴내고 읽으면서도 부모님의 크고 넓으신 사랑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에게 자식을 위한 '너 하나'이고 자식을 위한 또 '한 사람'입니다.

  오늘도  날씨는 이상기온으로  한여름을 꽃 피우고 지웁니다. 산천은 신록을 지나 녹음으로 접어듭니다. 그러나 부모님의 마음은 계절도 날씨도 상관없이 언제나 자식을 향해 "너 하나만 보고 싶었다"고 하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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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에』 2021-여름(62)호 <시에 산문 연재>에서

  * 양문규/ 충북 영동 출생, 1989년『한국문학』으로 등단, 시집『벙어리 연가』『영국사에는 범종이 없다』등, 산문집『너무도 큰 당신』『내 멋대로 생생』등, 논저『백석 시의 창작 방법 연구』, 평론집『풍요로운 언어의 내력』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