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순환선/ 이도훈

검지 정숙자 2021. 5. 19. 01:29

 

    순환선

 

    이도훈

 

 

  한 사람이 죽었고 법의학자들은

  그의 사인死因을 알아내기 위해

  부검을 했다.

  먼저 바쁘게 오르내린 계단이 줄줄이 달려 나왔다.

  몇 바퀴인지 기억도 안 나지만

  지구를 돌고도 남는다는 혈관엔 무수한

  정차 역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더 울리지 않을 휴대폰에서는

  남은 문자들이 재잘거렸고

  생전에 찍은 사진들은 모두 뒷모습이었다.

  몇 개의 청약통장과

  돌려막기에 사용된 듯한 카드와

  청첩장과 부의 봉투가 구깃구깃 들어있었다.

  그중 몇 건의 여행계획서가 나왔고

  퇴근길에 쭈그려 앉아 쓰다듬는

  고양이 한 마리와 찰칵찰칵

  열고 닫았을 열쇠 소리도 들어있었다.

  읽다 만 책들의 뒷부분은

  다 백지상태였다.

  사람들 몰래 지구는 자주 기우뚱거렸고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계획을 쏟거나

  계획에서 쏟아졌다.

  오늘은 순환선에서 내려

  애벌레의 마음으로 길고 긴 한숨을 

  느릿느릿 기어가 보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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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년간, 타향과 본향本鄕을 잇는 징검다리 문예지 『한솔문학』(제4호) 2020-12월 <특별詩選시선>에서

  * 이도훈/ 서울 출생, 2015년『시와표현』으로 등단, 2020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시집『맑은 날을 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