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도서관
정겸
오백 년 전 느티나무 아래 도서관이 개설되었다. 다른 도서관과는 달리 테이프커팅식도 없고 그 흔한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조차 참석하질 않았다. 진열된 책도 없고 사서직원도 없었다. 노인 몇 명과 낡은 접의자 몇 개 장기판이 고작이었다.
나무 그늘에 몸을 맡기고 있던 노인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한다. 저기 보이는 포구가 육지가 되기 전에는 커다란 포구가 있었지, 신라시대에는 산동반도를 오가는 무역항이었지, 조선시대 고종 때는 대원이 대감이 청나라로 끌려간 곳이기도 하지, 요즘 아이들은 우물고사가 뭔지도 모를 거야, 그때는 동네 우물을 찾아다니며 동해바다 용왕님 동해바다 물 주소, 서해바다 용왕님 서해바다 물 주소, 샘물이 잘 나오게 고사를 지냈지, 이런 주술은 어디서 찾을 수 없을 거야, 어디 그뿐인가 저 위에 있는 향교가 육이오전쟁으로 불타 없어졌을 때 설계도 없는 건축물을 당신 동네 노인들의 눈썰미로 과거와 똑같이 복원시켰지, 늙은이 말을 들으면 칠년대한七年大旱에도 쌀을 서 말 얻어먹는다 했지, 잠시 침묵이 흐르는 사이 노인들의 푸른 언어들이 뿌리를 타고 줄기를 타고 잎사귀 속으로 저장되고 있다. 수 만 권의 책들이 나무 가지에 주렁주렁 달려 있다.
느티나무에서 오랜 세월 지탱했던 굵은 삭정이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한 노인이 소리친다. 수백 권의 책이 날아갔다고, 노인들이 얼굴 없는 책을 다시 엮어 나무에 매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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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엠포엠』 2021-봄(89)호 <신작시>에서
* 정겸/ 1957년 경기 화성 출생, 2003년『시사사』로 등단, 시집『궁평항』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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