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아버지/ 유빈

검지 정숙자 2021. 5. 2. 16:09

<제11회 한국예술작가상 수상작> 中

 

    아버지

 

    유빈

 

 

  지금도 아버지, 하고 부르면

  당신이 사십여 년 대쪽처럼 꽂혀 계시던

  내 유년의 쌀가게

  나무 출입문이 열립니다

 

  문이 여닫힐 때마다

  문틀에 끼어 몸을 떨던 간유리창들

  그 유리창에 매달려 속절없이 나부끼던 모조지 한 장

  거기엔 아버지의 손글씨체로

  "츄-립-문"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아무리 틀렸다고 다시 쓰시라 해도

  아버지는 꼿꼿이 가게방에 앉아

  손님 없는 오후의 졸음만 견디셨지요

 

  전장에서 파편을 맞은 아버지의 허리는

  두 동강난 반도를 닮아 늘 욱신거려도

  졸음결 새눈 뜨고 츄립문만 응시하던

 

  그렇게 아버지의 오늘은

  열흘이 되고 십 년이 되더니

  급기야 어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쌀 다이에서 풍겨오던 통일미 냄새

  아직도 유년의 기억 속에 구수한데

  아버지는 서둘러 졸음을 깨워 영면으로 드시고

  당신의 막내딸은 이제야 깨닫습니다

 

  아버지가 써 내려간 인생은

  소리나는 대로 받아 적은 츄립문처럼

  주어진 대로 애써 살아낸 간유리창 같은 거라서

  다시 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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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시학』 2021-봄(98)호 <제11회 한국예술작가상 특집/ 수상작)> 中

   * 유빈(본명, 김성녀)/ 1965년 강원 원통 출생, 2007년 벤쿠버 중앙일보신춘문예 시 부문 & 2007년『문학마을』로 등단, 전문 번역가, 부동산 컨설팅, 현재 캐나다 벤쿠버 거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