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한국예술작가상 수상작> 中
아버지
유빈
지금도 아버지, 하고 부르면
당신이 사십여 년 대쪽처럼 꽂혀 계시던
내 유년의 쌀가게
나무 출입문이 열립니다
문이 여닫힐 때마다
문틀에 끼어 몸을 떨던 간유리창들
그 유리창에 매달려 속절없이 나부끼던 모조지 한 장
거기엔 아버지의 손글씨체로
"츄-립-문"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아무리 틀렸다고 다시 쓰시라 해도
아버지는 꼿꼿이 가게방에 앉아
손님 없는 오후의 졸음만 견디셨지요
전장에서 파편을 맞은 아버지의 허리는
두 동강난 반도를 닮아 늘 욱신거려도
졸음결 새눈 뜨고 츄립문만 응시하던
그렇게 아버지의 오늘은
열흘이 되고 십 년이 되더니
급기야 어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쌀 다이에서 풍겨오던 통일미 냄새
아직도 유년의 기억 속에 구수한데
아버지는 서둘러 졸음을 깨워 영면으로 드시고
당신의 막내딸은 이제야 깨닫습니다
아버지가 써 내려간 인생은
소리나는 대로 받아 적은 츄립문처럼
주어진 대로 애써 살아낸 간유리창 같은 거라서
다시 쓰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을
-전문-
----------------
* 『열린시학』 2021-봄(98)호 <제11회 한국예술작가상 특집/ 수상작)> 中
* 유빈(본명, 김성녀)/ 1965년 강원 원통 출생, 2007년 ⟪벤쿠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 2007년『문학마을』로 등단, 전문 번역가, 부동산 컨설팅, 현재 캐나다 벤쿠버 거주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바위·40/ 문효치 (0) | 2021.05.02 |
|---|---|
| 아이들은 어디에도 없다/ 김시철 (0) | 2021.05.02 |
| 성현아_흐르는 피가 아닌 흘린 피로...(발췌)/ 잠적 : 김이듬 (0) | 2021.05.02 |
| 어둠의 선물/ 김이듬 (0) | 2021.05.01 |
| 폐묵(廢墨)-1/ 장종권 (0) | 2021.04.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