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순간들
이태동/ 문학평론가, 서강대 명예교수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나는 멀지 않은 과거의 일들을 자신도 모르게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절망할 때가 많다. 물론 나는 이것을 나이테가 쌓이면서 나타나는 자연현상이라고 체념하지만, 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기억을 상실한다는 것에 대해 두려움마저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까마득하게 먼 과거의 유년 시절의 경험들이 어른이 된 후 내 삶 가운데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몇몇 아름다운 일들과 함께 잊히지 않고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을 인식하고 향수에 젖기도 하지만 적지 않은 기쁨을 발견한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 빛바랜 사진 속의 할머니가 어린 나를 데리고 진외가로 갔던 일이 잊히지 않고 기억나는 것은 그때의 경험이 나무나 깊고 절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불타는 듯이 뜨거운 태양 아래 할머니와 나는 아침부터 땅거미가 질 때까지 하얀 80리를 걷고 또 걸었다.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해서 마을 앞을 흐르는 강물에 세수를 하고 기와집들이 자욱한 마을로 들어가 진외갓집을 찾는 행복한 기쁨을 가졌다. 우리가 찾은 할머니 친정집은 비바람에 퇴락한 위엄이 있는 고가古家였지만, 매미들이 시끄러운 울음 속의 뜨거운 하얀 길을 오직 그 옛집을 찾아가기 위해서 쉬지 않고 걸었던 일들이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져 잊히지 않는다. 또 읍내에 있는 초등학교 10리 길을 오르내리며 보았던 자연 풍경은 그 어느 것보다 내 마음속에 어둠 속의 판화처럼 선명하게 빛나고 있다. 학교가 파하면 교문을 나서 굽이쳐 흐르는 강을 건너 국도를 벗어나 집으로 가는 좁은 길은 언제나 어린 나에게 멀기만 했다. 그러나 그 길이 잊히지 않는 것은 그 길 위에서 가졌던 어리석었지만 모험적이고 정열적인 경험 때문이었으리라.
그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전적 에세이 『존재의 순간들』에서 그것의 근본 원인을 발견하고 유년의 경험이 어른의 일상적인 경험과는 달리 변치 않는 시간을 초월해 삶의 근원적인 본질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라는 숨은 진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울프 역시 여기서 어른이 되어 가졌던 경험보다 어린 시절에 보고 느꼈던 아름다운 풍경을 시적인 산문으로 생생하게 회상하고 있다. 울프는 어머니 무릎에 앉아 어머니가 입고 있던 검은색 치마에 피어 있는 붉고 푸른 자줏빛 아네모네 꽃을 보았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또 어머니와 함께 갔던 어느 유아원에서 잠결에 들었던 해변의 파도 소리와 창문에 있는 블라인드를 움직이던 바람 소리를 감각적으로 느낄 만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울프는 어린 시절에 가졌던 이러한 아름다운 경험들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고 조용히 빛을 발하는 '비존재' 속에 시간을 초월해서 깊숙이 묻혀 있는 순수한 삶과 일치된 '존재의 순간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했다.
'존재의 순간들'은 그것들을 경험한 사람에게 별 특징이 없는 일상적인 삶의 휘장 뒤에 존재하는 순수한 근원적인 삶의 패턴을 드러내 준다. 그래서 일상적인 삶의 휘장이 찢어질 때, 우리가 어떤 순간을 완전한 의식으로 경험할 때, 세속적 에피파니(epiphany)와도 같이 삶의 진수眞髓를 강렬하게 경험한다. 이러한 '존재의 순간들'은 행운이 있는 사람들의 사소한 일상적인 삶 가운데 숨어 있는 '짧은 시'로 읽혀질 수 있다.
내가 경험한 유년 시절의 일들이 어른이 되어 경험한 다른 어떤 감동적인 경험보다 내 가슴에 지워지지 않고 계속 빛나는 것은 완전한 의식을 통해 '비존재'인 일상적인 삶의 장막 뒤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고 있는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삶의 무늬(pattern)를 경험했기 때문이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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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집 · 서울』 2021-3월(233)호 <문학의 향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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