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스트라를 위하여
변종태
살랑 바람이 불었다. 비명도 없이 쓰러진다. 쓰러진 뒤에 스스로 일어나 돌아와야 한다. 칼에 스치기만 해도, 총소리만 들려도 맥없이 쓰러지고, 피 묻은 얼굴로 스르르 일어나서 얼굴을 닦으며 총 대신 창을, 창 대신 작대기를 들고 솟을대문 앞에 서 있다. 문득 새 한 마리 스앗- 내 곁을 스쳐 날아가자 스스스 쓰러진다. 순식간에 대문 안쪽도 비빔회 그릇처럼 초장이 가득한데, 난 초장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그릇 언저리에 붙은 푸성귀처럼 널브러져야 한다. 컷사인이 나고 긴 창을 추스르고 무대에서 퇴장할 때에도 머리 위로 스앗- 날아가면 습관처럼 쓰러져야 한다. 스치기만 하면 쓰러지도록 메모리된 몸뚱이, 바람이 분다. 다시 쓰러져야겠다.
-전문-
▶영원회귀와 '도돌이표 무한반복'의 화두를 찾아서_변종태 시집 『목련 봉오리로 쓰다』(2020, 천년의시작)(발췌)_강수/ 시인
니체식으로 얘기하면, 이 시의 화자는 시간의 '담벼락'에 갇혀 있는 것이다. 이 시집에 형상화되고 있는 시간의 이미지들은 일회성이 아니라, 반복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시간'의 본질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그 양상이 시적 화자의 고통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더 나아가, 그 속에서의 아픔과 고통은 일상화되어 그의 삶 속에 고착화되어 나타난다. 이제 그 고통의 시간은 물질화되어 주체의 삶을 구체적으로 구속하기 시작한다. 그는 시간을 입고, 시간을 먹고, 시간을 자양분으로, 시간이 시키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시간은 철저하게 그를 '소외'시킨다. 이러한 '소외'의 기반 위에서는 주체가 시간을 사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주체를 살게 된다. 그러한 존재의 양태가 구체화되고 있는 것이 「엑스트라를 위하여」이다.
이 시에서 화자는 자신을 '스치기만 하면 쓰러지도록 메모리 된 몸뚱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메모리'는 '기억'이고 '과거의 현재화'를 직접적으로 표상하고 있는 시어이다. 그러한 삶은 수동적이며, 운명론적이고, 무한 반복되는 속성을 지니게 된다. 반면에 '엑스트라'는 일회적이다. 잠깐의 역할을 위해 존재한다. 어쩌면 편집되어 삭제될 수도 있으며, 그런 개념의 연장 선상에서 흔적없이 사라질 수도 있는 존재이다. 하지만 그 순간의 '삶'이, 지워질 수도 있으며 크게 중요하지도 않은 삶이, 오히려 화자의 삶을 지배하는 아이러니가 나타난다. 그런데 엑스트라로 등장하는 장면이 의미심장하다.
(······)
이 시에서 형상화되고 있는 '쓰러짐'의 이미지, '총소리', '창', '작대기' 등의 이미지는 자연스레 변종태 시인이 사는 제주도의 4 · 3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이 시집을 읽다 보면, 변종태 시인은 시를 통해 제주도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그림의 배경에는 4 · 3사건의 트라우마가 스며져 있다. (p. 시 257/ 론 256 (······)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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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시와사람』 2021-봄(99)호 <이 시집을 주목한다> 에서
* 강수/ 1998년『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서사시 대백제』, 포토포엠 시집『봄 꿈발전소』, 공연대본『오페라 운영』『국악 오페라 이도 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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