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空
이령
새떼가 터놓은 공멸의 파문이
과녁에 꽂혀 떨고 있는 화살처럼 파다하다
이 계절을 장식하는 쓸쓸함은 모조리 간벌된 옛 추억의 소산이지만 그리움이란 근본 면역이 없어 구름을 채록하는 저 새떼의 행락에도 느닷없이 일던 생의 어둠을 꺼내 포쇄曝曬하는 것이다
기억을 재편성하듯 하늘은 해종일 구름을 몰고 다니고
새떼는 날개 깊숙이 감췄던 이름들을 길어 올릴 때
나는 설핏 이운 눈물을 끌어 모아 남은 생의 권도를 생각한다
떠밀리듯 짐짓 알고도 모른 척 걸어왔던
조락한 내 삶의 목록들을 펄럭이며 날아오르는 저 새떼의 비상 아래서 웃자란 허명만큼 나로부터 멀어진 내가, 나를 관통했던 얼굴들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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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편견』 2020-겨울(16)호 <신작시 특집> 에서
* 이령/ 2013년 계간 『시를사랑하는사람들』로 등단, 시집『시인하다』, 한중시인사화집『망각을 거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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