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무죄추정의 원칙/ 이영혜

검지 정숙자 2021. 4. 22. 13:27

 

   무죄추정의 원칙

 

    이영혜

 

 

푸르던 이파리들이 누렇게 변해갑니다 어느 것이 당신의 본모습입니까?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 나는 잘못이 없습니다.

 

가지 끝에 땅 속 뿌리에 주렁주렁 매달린 재물들은 불법으로 취득한 장물이 아닙니까? 태양과 비와 바람이 공범입니까?

·····진술 거부권에 따라 답변을 거부하겠습니다.

 

곧 한해가 다시 소환될 것입니다. 움켜쥔 것 다 떨어질 텐데

이제라도 진실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나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거짓말과 몰염치의 단풍이 높은 데서부터, 북쪽으로부터 붉게 물들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애꿎은 젊은 잎들에게 죄의 된서리를 덮어씌우면 되는 겁니까?

······다 가짜 뉴스입니다

 

흰 눈이, 시간이 모든 것을 덮어줄 거라고 기대하는 겁니까?  

······다만 판결을 지켜보겠습니다

 

죄의 새잎들이 계절도 상관없이 무럭무럭 커가고 있다

바이러스보다도 무성하게 칡넝쿨처럼 온 땅에 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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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편견』 2020-겨울(16)호 <신작시 특집> 에서

 * 이영혜/ 2008년 『불교문에』로 등단, 시집『식물성 남자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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