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 아이스
정채원
한번 녹았던 마음이 다시 얼어붙으면 흉기가 된다
그림자 속에서도 애써 꽃을 피우다가
화분을 내동댕이 치다가
눈보라 치는 밤, 얼어붙은 기억의
터널을 지나면 교각이 있고, 교각을 지나면 또 터널이 있다
울음소리도 미끄러지는 터널을 지나
허공에 걸려 홀로 떨며 서 있던 그림자
터널에서 무심히 달려나오는 생명을 받아 안아
검은 이빨로 아작내는 허공의 검은 아가리
응달에서 오래 떨며 너를 기다렸어, 내 얼어붙은 팔다리를 꺾어서라도 너를 안으면 너의 목을 조르면, 너의 뜨거운 피로 얼어붙은 나를 녹여줄 수 있겠니?
급커브를 돌자마자 마주치는 얼굴
먼지와 눈물이 함께 엉겨 붙은 검은 색
살짝 젖어 있던 얼굴이 돌연
꽃모가지에 얼음송곳니를 꽂는다
누가 걷어찬 화분일까
산산이 부서져 중심이 잡힐 때까지
제 칼날로 저를 멈추기까지
제동거리가 예상 외로 길었다
맘껏 타오르지 못한 불은
재 대신 얼음을 남긴다
모든 얼음은 한때 불이었다
-----------------------------
* 『시와편견』 2020-겨울(16)호 <신작시 특집> 에서
* 정채원/ 서울 출생, 1996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슬픈 갈릴레이의 마을』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외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공(空)/ 이령 (0) | 2021.04.22 |
|---|---|
| 무죄추정의 원칙/ 이영혜 (0) | 2021.04.22 |
| 강희근_한국 서정시의 아이콘/ 바위-37 : 문효치 (0) | 2021.04.22 |
| 눈이 온다/ 신경림 (0) | 2021.04.21 |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이순희 (0) | 2021.04.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