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블랙 아이스/ 정채원

검지 정숙자 2021. 4. 22. 13:15

 

 블랙 아이스

 

 정채원

 

 

한번 녹았던 마음이 다시 얼어붙으면 흉기가 된다

그림자 속에서도 애써 꽃을 피우다가

화분을 내동댕이 치다가

 

눈보라 치는 밤, 얼어붙은 기억의

터널을 지나면 교각이 있고, 교각을 지나면 또 터널이 있다

울음소리도 미끄러지는 터널을 지나

허공에 걸려 홀로 떨며 서 있던 그림자

 

터널에서 무심히 달려나오는 생명을 받아 안아

검은 이빨로 아작내는 허공의 검은 아가리

 

응달에서 오래 떨며 너를 기다렸어, 내 얼어붙은 팔다리를 꺾어서라도 너를 안으면 너의 목을 조르면, 너의 뜨거운 피로 얼어붙은 나를 녹여줄 수 있겠니?

 

급커브를 돌자마자 마주치는 얼굴

먼지와 눈물이 함께 엉겨 붙은 검은 색

살짝 젖어 있던 얼굴이 돌연

꽃모가지에 얼음송곳니를 꽂는다

 

누가 걷어찬 화분일까

산산이 부서져 중심이 잡힐 때까지

제 칼날로 저를 멈추기까지

제동거리가 예상 외로 길었다

 

맘껏 타오르지 못한 불은

재 대신 얼음을 남긴다

모든 얼음은 한때 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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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편견』 2020-겨울(16)호 <신작시 특집> 에서

 * 정채원/ 서울 출생, 1996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슬픈 갈릴레이의 마을』 『제 눈으로 제 등을 볼 순 없지만』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