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선 『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
109, 223, 363쪽 읽기
오민석/ 시인, 문학평론가
▣ 엘리엇(T. S. Eliot)은 「전통과 개인적 재능」에서 "새로움이 반복보다 낫다"고 말한다. 모든 새로움은 반복되면서 '전통'이 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예술가에게 전통은 새로움이 도약하는 스프링보드 같은 것이다. 새는 기압의 힘으로 날고 배는 수압의 힘으로 뜬다. 저항해야 할 벽이 없이 탄성은 생기지 않는다. 벽을 향해 날아간 공만이 강력한 탄성으로 되 튀는 법이다. 전통의 벽이 없이 개인적 재능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모든 개인적 재능은 '개인' 주체의 '재현'이 아니다. 시인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시인이 아니라 시이며, 사람이 아니라 언어이다. 시인은 시를 '만드는', 즉 생산하는 자이지 자신을 재현하는 자가 아니다. 엘리엇에게 있어서 "시인은 표현할 '개성(personality)'이 아니라 특별한 '매체(수단, medium)'의 소유자이다. 인상들과 경험들, 그리고 생각들이 특수하고도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배열되는 것은 개성 안에서가 아니라 바로 그 수단 안에서이다." 시인이 시를 생산할 때, 주체는 최대한 뒤로 물러난다. 이런 점에서 엘리엇에게 있어서 "예술가의 진보란 지속적인 자기 희생, 즉 개성의 지속적인 소멸 상태"를 의미한다. "개성의 지속적인 소멸 상태"는 궁극적으로 "탈개성화(depersonalization)"의 상태, 즉 주체가 '영도(零度, degree zero)'가 된 상태를 의미한다. 시가 "개성의 표현이 아니라 개성으로부터의 도피"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이다. 그런데 주체가 소멸된 자리에서 어떻게 예술이 생산될 수 있을까. 엘리엇이 볼 때 소멸된 주체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예술을 생산하는 매체, 수단, 방법이다. 그가 볼 때 "성숙한 시인"은 훌륭한 개성이 아니라 "더 잘 완성된 수단"의 소유자이다. 완벽한 매체 안에서 "특수하거나 다양한 정서들은 자유자재로 새로운 배열체들(combinations) 속으로 들어간다." 주체를 후경화(backgrounding)하고 매체를 전경화(foregrounding)하는 엘리엇의 이러한 주장은 예술의 본질이 '사람'이 아니라 '표현'에 있음을 보여준다. (p. 109-110)
▣ 관념은 시의 적이 아니다. 관념은 시의 원료 중의 하나이며 시는 그것을 감각의 세계로 옮겨 놓는 기술(art)이다. 또한 애매성 혹은 모호성(ambiguity) 자체가 혐의일 수 없다. 신비평(New Criticism)의 대표주자 중의 한 사람인 엠프슨(W. Empson)은 모호성을 시적 언어의 가장 중요한 속성으로 간주하였다(『모호성의 일곱 가지 유형Seven Types of Ambiguity』). 그러나 시적 모호성은 관념적 모호성과는 다르다. 그것은 서로 다른 사물들을 강제로 연결시킬 때 사물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된 화학반응'에서 나오는 것이다. 시적 모호성은 사물들 사이의 (긴장된) 관계에서 생산되므로 물질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는 관념을, 정신적 강밀도를 끊임없이 '감각으로 번역하는 언어'이다. (p. 223-224)
▣ 사유는 결핍에서 시작된다. 유한한 존재만이 사유한다. 가령 무변광대한 존재, 신은 사유할 필요가 없다. 신은 스스로 존재하며, 스스로 세계이고, 스스로 현존(Persence)이므로 더 이상 궁구할 것이 없다. 문학은 결핍의 공간에서 시작된다. 문학은 결핍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의 산물이며, 마침내 결핍을 수용하(할 수밖에 없는)는 길고 긴 과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문학은 피조물이 만든 가장 피조물다운 생산품이다. 가령 어린아이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통해 인지한 '완벽한' 형태(게슈탈트)는 상상계의 동일시 전략이 만들어낸 가짜 그림이다. 어린아이는 자신과 세계 사이에 거울의 이데올로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인지하지 못한다. 어린아이는 그 자체 엄마의 몸과 분리되지 않은 이데올로기이다. 그것은 세계와의 완전한 합일 상태가 지속되었던 자궁의 세계를 꿈꾼다. 그러나 상상의 탯줄이 끊어지는 순간 그것은 타자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이었던 세계와 단절되며, 내부에 다양한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아이는 드디어 결핍의 세계로 진입한다. 먹지 않으면 끝없이 배고픈 운명이야말로 결핍의 시작이 아니고 무엇인가. (p. 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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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민석 비평선 『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에서/ 2020. 11. 20. <천년의시작> 펴냄
* 오민석/ 충남 공주 출생, 1990년 『한길문학』으로 시 부문 &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당선, 시집『굿모닝, 에브리원』 『기차는 오늘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등, 문학평론집『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 문학이론 연구서『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 『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문학연구서『저항의 방식: 현재 캐나다 원주민 문학의 지평』, 대중문화연구서 송해 평전『나는 딴따라다』 『밥 딜런, 그의 나라에는 누가 사는가』, 시 해설서『아침 시: 나를 깨우는 매일 오 분』, 산문집『경계에서의 글쓰기』 『개기는 인생도 괜찮다』, 번역서 바스코 포파 시집『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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