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새 날다
정겸
달빛 내려앉은 은행나무 가로수
상처 난 줄기마다 고단함 스며있다
성긴 가지에 박새 한 마리
함초롬히 하얀 달빛 모으고 있다
날카롭던 부리는 어느새 뭉그러지고
깃털 빠진 양 날개 창백하다
흘러버린 초록빛 영상들이 안개꽃처럼 피어나고
시간의 포자들은 어느새 바람 따라 사라져 버렸다
중년의 사내가 낡은 가방을 메고 엉거주춤 걸어간다
닳아빠진 구두 뒤창을 자식들 다 키우고 학자금과 맞바꾸었으나
살아 온 인생 드리 손해 본 장사는 아니었다
보도블록을 따라 무수히 찍혀 있는 발자국들
살아 온 이력만큼 희미하다
한줄기 바람이 박새의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사내의 뒤를 달그림자가 쫓아가고 있다
모처럼 둘만의 동행이다
솟아나는 푸른 기운들
늙은 박새 다시 한 번 날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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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사람』 2021-봄(9)호 <poem & poetry> 에서
* 정겸/ 1967년 경기 화성 출생, 2003년 『시사사』로 등단, 시집 『궁평항』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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