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천
문효치
어젯밤 내 꿈속에 들어오신
그 여인이 아니신가요
안개가 장막처럼 드리워 있는
내 꿈의 문을 살며시 열고서
황새의 날개 밑에 고여 있는
따뜻한 바람 같은 고운 옷을 입고
비어있는 방 같은 내 꿈속에
스며들어오신 그분이 아니신가요
달빛 한 가닥 잘라 피리를 만들고
하늘 한자락 도려 현금을 만들던
그리하여 금빛 선율로 채우면서
돌아보고 웃고 또 보고 웃고 하던
여인이 아니신가요
-전문-
나의 작품 어디까지 왔나> 한 문장: 내 문학 배경에 백제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자문하면서 내 나름의 답을 정리해 본다.
첫째는 죽음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감당하기 힘든 불면 소화불량 부정맥 피로감 등으로 심신이 쇠약해질 때로 쇠약해져 늘 죽음의 너울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이는 실로 견디기 힘든 무서움증으로 나를 옥죄었다. 그런데 천오백 년 전에 죽은 백제인을 만나 대화하고 교감하는 일을 반복하면서 죽음도 삶의 일부임을 깨달았고, 그렇다면 죽음이 무섭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둘째는 백제인의 의식과 정서, 혹은 역사적 사실 등을 현재로 끌어들임으로써 전통 수용의 한 방법으로 활용하자는 것이었다. 와당 불상 탑 여러 가지 장신구, 묘제 계백 성충 등의 애국정신이나 서동설화, 복식 등등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들의 미의식과 불교적 사유, 혹은 생활철학이나 세계관 등은 분명 지금에도 현현시킬 만한 전통적 요소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셋째는 공간의 활용이다. 백제사는 비어있는 공간이 많다. 사서의 기록에서 누락 축소 왜곡시킨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이 빈 공간은 시인의 상상력이 뛰어놀기 좋은 공간이다. 이 공간에 내 나름의 새로운 세계를 그려 넣는 작업은 흥미 있는 일이었다.
넷째는 약자 또는 짓밟힌 자의 은유적 대상으로서의 효과다. 백제는 삼국 중에서도 가장 선진적 화려한 문화를 꽃피웠던 나라다. 그러나 외세에 힘입은 신라에게 망한 나라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의 패전국은 철저히 짓밟히게 마련이다. 백제도 그랬다. 결국 백제는 약해서 패전한 것이고 약자의 은유물로 활용할 가치가 있다. 나는 이런 몇 가지 시각으로 백제를 바라보며 시를 써 왔다.
(······)
나는 요즈음 바위에 빠져 있다. 그놈 얼마나 답답할까. 그도 할 말도 많고 억울한 일도 있을 텐데 말 한마디 안 하고 버티고 있으니 말이다. 가고 싶은 곳은 없겠는가, 묵언 부동의 것이라고 생각이 없겠는가, 수억 년 다져진 생각과 사연이 얼마나 많겠는가, 저 형벌 같은 존재가 어쩌면 위대해 보인다.
그의 말을 들어보려 귀 기울인다. 무언가 말할 것만 같다. 다만 내가 잘 못 알아듣는 것일 게다. 생각이 쌓이면 저렇게 무거워질까, 저 침묵의 언어가 내 귀의 문을 열고 들어오길 기대하며 바위를 응시하고 있다. 어쩌면 저 지하에서 자아올라 오는 말, 어쩌면 우주의 먼 근원에서 수천억 광년을 달려온 말, 아니면 삶의 경계 너머 명계에서 잠자다가 깨어난 말이 들려올 것만 같다. (p. 시 34/ 론 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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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문학』 2021-2월(624)호 <이 시대 창작의 산실/ 나의 작품 어디까지 왔나/ 대표작> 중에서
* 문효치/ 1966년 ⟪서울신문⟫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무령왕의 나무새』 『왕인의 수염』 『모데미풀』등 15권, 시조집 『나도 바람꽃』, 산문집 『시가 있는 길』등 3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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