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시로 여는 세상』 신인상/ 당선작> 中
오늘은 햇빛을 사러 갑니다
주향수
당신에게도 마음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겠어요
내 마음만 생각하지 않기 위해서지요
베란다에 신문지를 깔고 흰쌀을 쏟아붓습니다
한낮의 햇빛 사이사이 기어 나오는 쌀벌레 소리 퍼져갑니다
눈동자만 숨죽인 채로 덩그러니 서서 바라보는데
쌀독을 열자 깜깜한 시간 안쪽이 꿈틀댑니다
정적 속에 들킨 쌀벌레의 하얀 숨소리인지도 모르겠어요
마음 틈틈이 숨겨진 말들도 기어 나오고 있습니다
당신이 내뱉은 말은 귓가 어디쯤 헤매고 있는데
쌀벌레의 느린 움직임이 바깥으로 향합니다
내 몸 위로 생각의 발자국이 지나가고 있어요
깊숙이 숨은 것을 기어이 끌어내고 만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이곳은 바람이 불지 않는 방입니다
햇빛 하나 없는 공간에서 곰팡이가 피어나고
혼자 지낸 시간이 보라색을 만듭니다
페이지마다 피어난 까만 꽃을 꺾어주세요
곰팡이 무늬는 도드라지고
벌어진 틈 사이 물결 자국에서 흔적을 쫓아갑니다
한번 생겨난 얼룩은 쉽게 사라지지 않겠지요
하얀 종이에 배인 냄새는 찢어주세요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까지 엉겨 봍은 말들을 떼어냅니다
이제 사라진 기억만 허공으로 흩어집니다
-전문-
* 심사위원: 최문자 송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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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로 여는 세상』 2021-봄(77)호 <신인상/당선작> 中
* 주향수/ 전남 강진 출생, 강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