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비에서
백인덕
눈이 오는데
한밤의 서러운 칼질
핏기 없이 눈만 쌓이는데
틈 없는 곳 따라
초입조차 가르지 못하는 칼질
노동인지
놀이인지 모르는 집중
초저녁,
아무나 되고 싶은
불안의 웅덩이에 눈발 희끗대고
언제나 그러하듯
나태의 열정으로 꺼내든 책
시작의 무심한 손가락 끝에
자꾸 마른침 바르다
권태가 끝난 바로 거기
뒷장에는 다시
숱한 열망이 캄캄하게 식는데
반드시
그 무엇인가 있을 것 같은
있어야만 할 것 같은
페이지 하나 세워
새 칼로 양면을 가른다.
세상에는
눈이 오다 그치고 여전히
제 목에 주먹을 밀어 넣는 사람들
서러운 아직은
한 말씀도 만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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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로 여는 세상』 2021-봄(77)호 <신작>에서
* 백인덕/ 1991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북극권의 어두운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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