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나무의 서(書)/ 허연

검지 정숙자 2021. 3. 29. 03:38

 

    나무의 서

 

    허연

 

 

  살았던 날들을 헤아려 보면

  어떤 날은 셀 수 있었고

  어떤 날은 셀 수 없었다

 

  나무는 바람에 절을 하다 말고

  생을 마감한 채

  가마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마지막 벽돌이

  화구를 막을 즈음

  살 타는 냄새가 났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들의 선한 눈망울이

  하늘을 올려다 볼 때

 

  마당에 넣어놓은 홑이불이

  천천히 흔들릴 때

 

  사소한 슬픔이 새 한 마리와 함께

  날아갔다

 

  너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그대

  인질처럼 거리에 잡혀 있었고

  기도의 한 형태처럼 거리에 서 있었지

 

  들짐승들이

  연기가 날아가는 방향을 보며 짖는 저녁

 

  나무여.

 

  --------------------- 

  * 『계간 파란』 2021-봄(20)호 <poem>에서

  * 허연/ 1991년 『현대시세계』로 등단,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내가 원하는 천사』 『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