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계간 파란 신인상 당선작> 中
회문回文 공작소 외 1편
김민지
엄마는 핑킹가위를 사 주지 않았다 옆 짝꿍이 가위질 한 번에 여러 계단을 쌓아 올리는 동안
나는 계단을 헛딛는 상상을 하면서 가위질을 배웠다 지그재그 들쑥날쑥 기러기와 토마토 같은 단어를 생각하면서
마음 한쪽에 빛이 들어도 다른 한쪽에 그늘이 진다는 사람 앞에서 양면 색종이 한 장을 집어 들고 무엇이든 접어 보이는 연습
검정을 뒤집으면 주황색 같은 살갗과 빨간 피부터 보이는 뒷면도 있었지만 나는 딱지 같은 검정을 매만지면서
전면이라는 말을 배웠다 그때부터 모든 전면전에는 기억할 만한 어둠이 있음을, 꿈자리에 풀을 바르고 일어서면 따라붙는 간밤의 기억들
엄마는 핑킹가위를 사 주지 않았다 쓰다 남은 풀들만 늘어났고 어느 순간부터 야맹증을 앓았다 전면 승부는 밤에 시작되는데
낮에 만난 친구들은 계단 옆에 난간이라도 세워 보라 했다 그런 난관쯤이야 나는 기어서라도 오를 거야 생각했으니까
나는 무언가 세워 올리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계단은 오르는 것 계단은 오르는 것
어느 날 다시 가위를 들고 잠에 들었을 때 문을 열고 지하실 계단에서 구르는 꿈을 꾼다
온몸을 계단이 두드린 순간, 엄마는 키가 클 거라 했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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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키스
벨벳 천을 여러 방향으로 쓰다듬는다
빛이 닿는 족족 얼룩처럼 보이는 무언가
결이 있고 부드러움이 있고
잘 눕는 방향이 아니면
자꾸 헝클어지는 내가 있다
어젯밤 잠꼬대 속에는 아무런 악의가 없었다
같은 자리의 살집만 꼬집는 꿈에서 깨어났을 뿐
영정 속에서
말없이 다물었던 입을 떼는 문상객
그 순간 그의 입술을 보고
그것만큼 붉은 것을 본 적 있는지 되짚어 봤을 뿐
급하게 뜬 육개장
그릇엔 숨이 죽은 피가 걸려 있었고
숟가락으로 그릇 안으로
밀어 넣으며
속으로
자꾸만 소화시키는 나를 허기라고 믿었다
불 꺼진 방에서 벨벳 천을 가만히 쓰다듬을 때
빠져 가는 멍의 가장자리를 닮아 옅게 번져 가는 달빛
고민을 벗어난 고민은
이제 어떤 것도 훔쳐보지 못한다
-전문-
* 심사위원: 장석원 이찬 이현승 장철환 김건영 정우신 조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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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 2021-봄(20)호 <제1회 계간 파란 신인상 당선작> 에서
* 김민지/ 1989년 출생, 고려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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