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아버지, 흰 눈이 내렸습니다/ 이진귀

검지 정숙자 2021. 3. 13. 18:01

 

    아버지, 흰 눈이 내렸습니다

 

    이진귀

 

 

  잘 가꿔진 아파트 정원 한 모퉁이에

  한 가지만 남은 참으로 가난한 소나무 서 있습니다

  평소에는 눈에 잘 보이지 않던 그 나무, 작대기처럼 서 있습니다

  한겨울 참 눈이 많이도 내린 밤입니다

  아버지, 보이나요 흰 눈이 참 많이 내렸습니다

  가지 끝 몇 가닥 남은 솔잎에 흰 눈 쌓였습니다

  순백의 마음으로 무겁게 받아들고는

  뿌리에 불끈 힘이 들어가야 했습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올 때는 뿌리째 흔들리며

  파도처럼 밀려왔다 가는 생존의 탱탱한 전율,

  외다리로 서 있는 삶의 발끝이 오늘도 위태롭습니다. 

 

  봄이 지나면서 그 소나무 조경사의 손에 잘려 나갔습니다

  오래 버텨왔지만 딱 여기까지라고 결단을 내렸나 봅니다

  애초에 척박한 땅에 심어진 연을 탓할 수 없습니다

  탓할 수 없는 당신의 삶에 술 한 잔 올리고

  나는 한동안 그루터기 주위를 빙빙 떠돌았습니다

  보이지 않아 보지 못한 그 삶의 무거운 깊이를 새로 재었습니다

  남은 그루터기 위로 바람은 소리 없이 지나갔고

  땅에 뿌리 내린 그 흔적만 꽃 향기 풀섶에 숨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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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교와문학』 2020-가을(82)호 <시>에서

   * 이진귀/ 1960년 경남 남해 출생, 2019년 『에세이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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