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박명순_생명력 있는 시를 위한 요건(발췌)/ 일찌기 나는 : 최승자

검지 정숙자 2021. 3. 8. 23:54

 

    일찌기 나는

 

    최승자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너를 모른다 나는 너를 모른다.

  너 당신 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전문-  

 

  ▶ 생명력 있는 시를 위한 요건(발췌) _ 박명순/ 문학평론가

  최승자의 시가 보여준 시대 절망과 죽음 의식으로 담아낸 시창작이 하나의 사례가 될 것이다. 현상의 허상에 머무르지 않는 안목이 만나는 지점은 결론이 아닌 탐색이며, 해답이 아닌 물음이어야 한다. 무릇 여성성은 피해자 의식을 넘어서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시가 살아있는 세상, 시를 필요로 하는 세상을 위하여 노래하는, 힘이 있는 시를 위하여 부정의 정신과 현실인식돠 실험정신에 충실해야 한다.

  생명력 있는 시란 살아서 효용을 발휘하는 문장을 말한다. 껍데기만 남은 박제된 존재가 아니라 꾸준히 성장하면서 변화하는 사회에서 다양한 해석으로 가치와 호흡할 수 있는 시라고 단언한다. 시장성이 아닌 현장성이 새롭게 실현되면서 시대를 담아내고 민족 · 민중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개개인의 주체적 욕망이 살아있는 시를 의미한다. 바야흐로 우리는 문학의 상품화 시대에 살고 있다. 문학의 마케팅 전략에 의해 제작된 상품화 현실에서 우리는 진정한 작가와 참된 작품을 제대로 만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어야 한다. 많이 알려진 시가 반드시 훌륭한 시가 아니라는 진실을 입증할 수 있는 시정신을 키워내야 한다.

  생명력이 끈끈한 시를 쓰기 위해서는 온몸으로 세상과 맞서는 의기가 있어야 한다. 그 의기는 오체투지의 수도적 자세이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일상의 형식으로 맞붙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독특하게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새로운 시의 형식으로 자동 발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밑거름이 됨을 우리는 믿는다. 잔본주의적 삶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부당함을 부정할 수 있는 철학적 바탕을 쌓아야 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시인의 삶과 시창작의 만남이 진행되는 것이다. 물론 인식의 세계와 시창작의 세계는 일원론적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시창작의 순간은 어떤 논리나 법칙으로 설명할 수 없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녹아들었던 세상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거부하며 쌓았던 인식의 틈새에서 피어나는 언어들의 춤이다. 결국 우리에게 보여지는 건 언어들, 그들의 조합과 아우라일 것이다. (p. 시 34/ 론 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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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와문화』 2020-가을(55)호 <특집/ 긴 생명을 지닌 시의 비밀>에서

  * 박명순/ 2012년 『작가마루』로 평론 활동 시작, 평론 「바흐친의 눈으로 이문구 읽기」 등, 평론집 『슬픔의, 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