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묘墓
고형렬
태양을 중심으로 지구가 돈다
그곳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다
그들이 일어날 때의 시간인데도
산의 그늘만이 길게 뻗쳐 있다
햇빛이 해골의 눈 속을 통과하며
바람이 불고 오늘은 눈이 내린다
지구는 혼자 외로이 겨울을
빠져나가면서 공중에 떠 있을 뿐
인류는 모두 어디에 갔는가
빈 지구만이 태양을 돌면서 또
태양은 지구를 데리고 멀고도 먼
움직이는 우주를 따라가는 은하
그 은하계를 따라 사라져 간다
지구는 모든 조상의 묘를 싣고
밤과 낮을 끊임없이 통과하리라
-시집 『서울은 안녕한가』, 1991.
▶기후변화의 도전에 대한 현대시의 응전(발췌)_송용구/ 문학평론가, 시인
지구는 인류의 모든 '해골'이 묻혀 있는 거대한 공동묘지다. 귄터 쿠네르트의 시에서 '죽은 인류'의 무덤으로 변하였던 지구가 고형렬의 시에서 인규의 해골과 모든 생물의 주검을 싣고 태양 주변을 도는 '공' 모양의 묘墓로 재현되었다. 엔첸스베르거가 띄워 보냈던 쓸쓸한 조사弔詞를 '지구 묘' 앞에서 한 번 더 읊어야만 하는가? 고형렬이 이토록 참담한 종말의 임계점을 예언하는 근거는 그의 현실 인식에서 나온다. 「지구 묘」가 수록된 시집 『서울은 안녕한가』의 부제는 '환경시'다. 부제가 시사하듯 시집의 내용은'서울'의 환경오염 실상을 고발한다. (p. 시 28-29/ 론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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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산맥』 2021-봄(45)호 <기획특집/ 기후변화의 도전에 대한 현대시의 응전>에서
* 송용구/ 문학평론가, 시인, 저서 『생태언어학의 렌즈로 바라본 현대시』 『생태시와 생태사상』 『인문학, 인간다움을 말하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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