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나를 불태워줘/ 장석원

검지 정숙자 2021. 3. 4. 22:00

 

    나를 불태워줘

 

    장석원

 

 

  목구멍에 비명이 고인다 지난밤 이 세상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네가 나를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나누어준다는 너의 사랑은 구원일까 기다린 나에게 정표라고 너는 대답하겠지 그동안 행복하지 않았어

 

  데려간다고 말했지만 네가 나를 버리고 떠나려는데 어디로 돌아가서 거울 조각을 묻어야 하는가 이곳에서 나는 부스러지겠지 누차 누차

 

  불꽃이 사그라진 후에 폭포처럼 너는 뚜렷해지고 나에게는 네가 있고 나에게는 너라는 발광체가 있어 넌 핏방울 같아

 

  편도 같은 달이 다가온다 슬픔은 내 몸에서 시작되었는데 너는 왜 내 몸 위에서 울고 있나 무릎 아래는 왜 재가 되나

 

  네가 떠나고 나는 이끼처럼 흐느끼겠지 슬픔은 물컵에서 열렬하게 넘실거리겠지 난 꿈틀거리겠지 극복하겠다고 되뇌면서

 

  발자국을 따라가면 네가 있을까 뺨 위의 빗물 너의 얼룩 너의 냄새 씻어낸다 너를 잊었기에 채찍을 맞아도 뼈가 부러져도 좋은데

 

  불붙기 전에 몸이라도 편취했다면 알약 같은 나의 미래 달라졌을까 봉별 후 정맥에서 밤이 퍼져 나오네 너의 눈에 밤의 빗방울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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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산맥』 2021-봄(45)호 <신작시>에서

  * 장석원/ 2002년 ⟪대한매일신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아나키스트』 『태양의 연대기』 『역진화의 시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