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의 뇌
신두호
비를 준비하는 구름들의 이동
암실처럼 붉은 밤을
흘러 다니며 부유하는 속삭임들
기원을 찾아 떠도는 말들 사이에
내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할 때
피부를 타고 흐르는 어둠과 정적
세계가 온갖 생명체들로 채워져 있을지 몰라
그것들을 구분하려 생긴 신호와 표시들
이제는 무력해진 법률 속에
점멸하는 것만이 유일한 생명의 일
손을 내미는 것이
두 눈을 감는 것과 같아
그곳에서 자취를 감추는
너라는 목소리의 형상
길은 하나의 색상으로 통일되어 있다
우리가 서로에 기울어지기 전부터
직선적인 태도로 완성되어
합의되기 이전의 세계를 구석들로
말로 흉내 낼 수 없이 구체적으로
만들어 보여주고 있는 길
불빛 속에 휘말려드는 잎들
가능한 한 밝아지려는 어둠에 흔들리는 가지들
신전의 일부분처럼 기둥들은 세워지고
꺼지지 않는 어떤 불꽃도
그 끝에서 자신의 사라짐을 반복하고
우리가 서로의 말을 알아차릴 때까지
계속해서 점멸하는 검고 붉은 밤
흐릿하게 번지는 풍경들의 시야
헤쳐 나가야 할 것으로 주어진 길 위의 자연
움직이는 것들에 부여된 생명 속에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꿈꾸는 심장
그곳에서 너는 두 눈을 뜨고
주어진 두 손을 번갈아 뒤집어 보고
네가 숨 쉬며 도망쳐온 처음의 잠으로부터
너라는 존재의 실물을 맞이한다
침묵 속에서 굳어져가는 구름들의 형상
이제 막 생겨난 바람을 붙잡아두는 일
말들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흐르는 물
우리의 형체가 우리의 행위 속에서만 보존된다면
사소한 움직임만이 세계를 감싸 안는다면
명령처럼 내려오는 것은 하나의 목소리
불빛 속으로 깊어지며 시작되는 걸음
-전문-
▶ 소여의 세계, 예감의 시(발췌) _ 문신/ 시인, 문학평론가
소여의 세계는 "이동"라고 "부유"하며 "떠도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렇게 "흐르는" 세계는 인식론적인 방법으로 주체와 "합의되기 이전의 세계"이다. 따라서 그 세계는 미결정 상태에서 "기원을 찾아 떠도는 말들"과 같고, 그러한 말들 "사이에/ 내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구도는 신두호의 시에 중요하게 작동하는 원리이다. '사이'는 "온갖 생명체들로 채워져 있"는 소여의 세계이고, 그 세계는 "그것들을 구분하려 생긴 신호와 표시들"로서 인식되어야 할 세계이다. 이 '사이'를 구축함으로써 신두호 시인은 소여된 세계로부터 주체 탄생의 거점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창조와 순간이 틈, 균열 같은 '사이'를 매개로 발생한다는 사실을 떠올려보자. 모든 존재는 그 '사이'를 비집고 헤집으며 마침내 다른 차원으로 통과해 나온다. 기능적으로 '사이'는 "길"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 '길'은 헤쳐나가야 할 것으로 주어"져 있고, 바로 "그곳에서 너는 두 눈을 뜨고" "너라는 존재의 실물을 맞이"할 수 있는 것도 그 '길'이 어떤 것들 '사이'를 매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p. 시 92-94/ 론 128-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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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딩아돌하』 2020-겨울호 <신작 소시집/ 작품론> 에서
* 신두호/ 광주 출생, 2013년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으로 등단, 시집 『사라진 입을 위한 선언』
* 문신/ 전남 여수 출생, 2004년《세계일보》신춘문예 시 부문 & 2016년《동아일보》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등단, 시집 『물 가죽북』 『곁을 주는 일』, 동시집 『바람이 눈을 빛내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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