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나는 아직 허공에 닿지 않았다/ 박희연

검지 정숙자 2021. 2. 4. 02:08

 

    나는 아직 허공에 닿지 않았다

 

    박희연

 

 

  1.

  안 와?

  오늘 아침

  무심히 묻는다.

  땅과 나뭇잎

  한 시절

  바라만 보다가

 

  2.

  링거 줄이 주렁주렁 매달린 병상의 당신은 새벽녘 3주치의 신경안정제를 한입에 털어 넣고 응급실에 실려 왔다. 당신의 옷을 갈아입혀 주다가 허벅지에 길게 난 손톱자국을 보았다. 정신을 잃어갈 때 제 손톱으로 긁었을 것이다. 눈을 뜬 당신과 잠시 데면데면하게 눈을 맞췄다. 그 눈 밑이 움푹 패어 검었다. 우리에게 심연이 있다면 바로 저 눈 밑일 것이다. '거리에 색이 바랜 나뭇잎이 하나둘 떨어지고 있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하지 않았다. 당신의 연못은 너무 아련하였으므로, 우리는 같이 있어도 늘 혼잣말이다. 당신은 다시 잠들었다. 목덜미의 정맥이 푸른 잎맥 같았다.

 

  3.

  '마지막 잎새'의 무명 화가처럼

  당신 등을 안고 누워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리에서 주운 나뭇잎의 도도라진 잎맥을

  오래도록 손끝으로 문질러 보았다.

  미처 해독되지 못한 전언이 진물처럼 손끝에 스며들었다.

  우리는 모두 무명이었지만 당신은 내게 늘 치명적이다.

  혼곤한 잠은 바람과 중력의 다툼 같아

  내가 떨어져 내릴 좌표를 두고 서로 싸운다.

  *

      *

    *

            *

  한 시절 바라만 보던 그 거리엔 여전히 나뭇잎이 날리고 있다. 빛바랜 그 잎이 공중에 새겨놓은 배면의 무늬. 그 무늬가 사라지기 전에 난 어디로든 돌아가야 할 것이다.

    -전문-

 

    심사 위원 : 이병률  권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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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상인』 2021-1월(창간)호 <2021년 상상인신춘문예 당선작> 中

   * 박희연/ 1973년 출생

  2017년 <제35회 마로니에 전국여성백일장> 시 부문 장원(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8년 <국제융합예술대상> 작사상 부문 수상 (국제융합예술협회)

  2014년 세월호 단편영화 <다녀오겠습니다> 기획제작

  2019년 천안춤영화제 개막작 <탱고 다이어리> 각본

  2020년 사북항쟁 40주년 기념 뮤지컬 <사북, 화절령 너머> 대본

  2021년 현재 다큐멘터리 <백제의 마지막 밤>(가제) 대본 집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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