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돌아보지 않는 자의 독백/ 이승하

검지 정숙자 2021. 1. 31. 12:07

 

    돌아보지 않는 자의 독백

 

    이승하

 

 

  그대, 걸어온 길이 험난했다고 말한다 나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대, 살아온 날이 황혜했다고 말한다 나 그때 아무 말로 하지 않았다

 

  술에 의지했었다고 여자를 믿어 보았다고 돈 버는 일에 미쳐 가족과 시간 보내지 않았다고 가로수를 보고 가을이 온 것을 알았다고 거울을 보니 머리가 세어 있더라고

 

  그대, 밤 2시나 3시쯤 서울역 앞에서 광화문까지 걸어 본 적이 있는지? 그해 최고의 적설량을 보인 날 아침에 비원 앞에서 삼청동까지 걸어 본 적이 있는지?

 

  그대 그때 길 걸으면서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지난날을 생각하면 지긋지긋했고 내일 할 일 생각하면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을 테니

 

  서울에서 살다 보면 욕을 하게 되는데 그대가 종종 하는 욕은 빌어먹을!과 제기랄!이었다 남을 욕하기엔 그대 죄가 너무 컸다

 

  운전을 할 줄 모른다 내비게이션이 나오기 전엔 길치였고 근시에 난시, 시상이 떠오르면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면서 몽롱하게 아련하게

 

  그대 한 말이 남에게 상처 준 적이 많았겠지 그러나 어쩌겠는가 시를 쓰는 것이 운명이니 오늘도 횡설수설이겠지만 비틀거리지 않고 앞을 보면서 그냥 앞만 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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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간 『서정시학』 2020-겨울(88)호 <특집/ 이승하, 큰 세계를 그린 작은 시편들> 에서

  * 이승하/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시집 『우리들의 유토피아』 『예수-폭력』 등, 평전 『마지막 선비 최익현』 『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