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범순著『노래의 상상계』에서 발췌한 부분 셋
126쪽) 이 글자바위 위쪽으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병풍바위와 암반으로 이루어진 선사시대의
제단(이곳을 나는 '계룡 스핑크스 신전'이라고 부른다)이 하나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거울상처럼
좌우가 뒤집혀 있다. 이 두 바위에 새겨진 것들이 놀랍게도 이러한 거울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을 누군가 매우 섬세하게 새겨놓았던 것으로 확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몰랐다. 이 선사시대 유적이 막대한 기호 또는 그림글자로 채워진 보물인데
여전히 무관심 속에 방치된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2년 전에 이 유적들을 답사했었다. 여러 사진
자료를 판독하는 가운데 이 거울상 구조를 알아내었다. 구불거리게 새겨진 전체 X자 기호를 처음
에는 자연적인 균열로 생각했지만 양쪽 바위에 똑같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 의미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335쪽) 언어의 자의식과 수사학의 팽배 속에서 현대시는 시들어가고 있다. 현대시의 대부분은
언어의 감옥 속에 수많은 미로를 만들고, 그 공간에서 미묘한 심상들을 빚어낸다. 이 복잡한 큐브
공간 속에서 현대인들이 질식하며 내지르는 비명소리들을 시인들은 자신의 시언어로 바꿔 쓰고
있다. 이미 그들은 자연 및 우주의 생명력과 소통되지 않는 이 좁혀진 자의식적 언어공간 속으로
유폐된지 오래인 것이다.
김소월의 민요시가 개척해간 영역을 이러한 현대시의 황무지에 맞세우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현대 자유시가 이탈해간 바로 그 부분, 즉 노래와 시가 결합되어 있는 그 지점에 우리가 찾아야
할 열쇠가 있다고 생각한다.
800쪽) 백석은 이렇게 썼다. "사람은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고 넋 하나를 얻는다는 크나큰 그
말을". 이것은 허준이 자신에게 해준 말인 듯하다. (…) 결국 이 세상에서의 삶이란 영혼의
승화를 위한 '나들이'이며, 만일 그렇게 승화된 '넋'을 하나 얻게 된다면 그것은 세상의 그 무엇
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백석의 시 '허준')참조〕
*『노래의 상상계』'수사'와 존재생태 기호학/ 2011.12.25.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펴냄
* 신범순/ 충북 서천 출생, 서울대학교 국문과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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