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드라미가 뱀이었다는 가설
박미라
버드나무 가지에 걸어둔 허물은 잘 마르고 있을 것입니다
물기 걷힌 허물의 기침에 발 걸리는 이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허물이란 대체로 사라지지 않는 법이니까요
한 번쯤 일어서고 싶었습니다 멀리 바라볼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리움이란 그리움으로부터 가장 아득한 곳에 머무는 습성이 있으니까요
뜻밖에, 뿌리를 허락하고 바람과 햇살을 함께 내린 배려가 눈물겨웠지요
꽃밭이라는 감옥으로 옮겨질 줄 짐작이나 했겠는지요
꽃으로 몸 바꾸어 서있는 내게 아무 죄도 묻지 않는 날들이 지나갑니다
어느 논배미의 오후를 꺼내 들고 동짝에 잔물결을 일구거나
잘게 부순 비늘을 해종일 바스락거리지만 아무도 나를 눈치 채지 못하는군요
타오르지도 못하고 옯겨 붙지도 못하는 이번 생에서도 슬픔을 지우기는 틀렸습니다
굳이 시뻘건 혓바닥을 감추고 싶지도 않습니다 어차피 당신은 꽃이라고 부를 테니까요
찔레나무 떨기 아래 잠들던 푸른 달밤이 있었지요 어느 손이 말아 쥔 혁대처럼 마음을 싸매고 울음을 베어 먹곤 했지요 그만 거기 눌러앉아 까닭 모를 참회를 꿈꾸고도 싶었지요
그렇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꽃으로 와도 뱀으로 다녀가도 당신이 설계한 감옥일 뿐입니다
저 바람개비를 보라고, 한없이 먼 공중에도 감옥이 있다고, 어르고 달래는 당신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정녕 공평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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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다층』 2020-가을(88)호 <다층 시단> 에서
* 박미라/ 1996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울음을 불러내어 밤새 놀았다』 외 여러 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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