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김없이
울라 한(Ulla hahn)
나는 너를 네 세월의 구덩이에서 꺼내
나의 이름 속에 담가 놓고서
네 손과 살갗과 머리칼을 핥아주며
영원히 내 것이며 네 것임을 맹세했다.
너는 내 가던 길을 돌려놓았다. 너는 뭉근한 불로
너의 표식을 내 얇은 피부에 새겨놓았다.
나는 나임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나는 급히
나 자신과 나의 맹세로부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래도 기억이 아름다운
잔해로남아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불렀다.
그러나 나는 이미 내 눈에 보이지 않았고
내 안에 숨겨졌다. 너는 나를 깊숙이 감추었다.
이윽고 나는 완전히 네게로 녹아들었다.
그러자 그때 너는 나를 남김없이 뱉어냈다.
-전문, 1981.
▶사랑의 굴레와 자유_울라 한의 시「남김없이」(발췌)_김재혁/ 시인, 고려대 독문과 교수
울라 한(Ulla Hahn)은 올해 74세로 독일에서 내로라하는 현역 시인이다. 그는 1970년대 초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여 1981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독일 평단의 황제였던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의 찬사를 받으며 시인으로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 그때 이슈가 된 것은 시집 『머리 위의 심장Herz uber Kopf』이다. 이후 여러 편의 소설도 내놓았지만 그의 영역은 역시 서정시, 특히 사랑 시이다. 첫 시집이자 성공작인 이 작품집은 남녀간의 매우 사적인 사랑을 서슴없이 다루어 서정시의 방면에서 한 획을 그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현대적 사랑과 삶의 양상을 색채 짙은 이미지의 시어로 표현한 시들은 지금도 여전히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라이히라니츠키는 그의 시를 "친숙한 운과 리듬, 형식 그리고 표현법을 통해 우리 자신을 재인식하게 하는 삶의 감정을 노래한다"고 평한다. 사랑과 열정, 그리움과 기다림, 분노와 슬픔 등 인간의 감정을 즐겨 다룸으로써 그의 시에서 우리는 자연스레 우리 자신의 모습을 만나게 된다. 첫 시집 제목이 보여주듯이 "머리"보다 "심장"을 우위에 둔 그의 시는 관념이 아니라 감각과 신체에 집중한다. 직관을 따르자는 모토가 그의 시 속에서는 라이트모티프로 박동질친다. 사랑 시는 심장의 노래이다. 사랑은 고통 속으로 번지점프를 해야 하는 큰 모험으로 시작된다. 시 「남김없이Mit Haut und Haar」(1981)를 보자. (p. 166-167)
시인은 일상의 언어로 사랑의 달콤함과 고통 그리고 극단적 이별을 노래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한때 인생의 고난에 빠진 어느 한 남자를 어두운 구덩이에서 구하여 사랑의 관계를 맺기에 이른다. 이 시는 회상이다. 시적 화자는 사랑을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버리고 남자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다. 모든 것을 다 바쳐 자신이 사라진 어느 날, 완전히 둘이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한 어느 날, 그는 그녀를 완전히 배신한다. 사랑의 극단적 반전이다. 전통적이건 현대적이건 남녀간의 사랑의 조화는 멀다. (p.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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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로여는세상』 2020-겨울(76)호 <세계시인 시 읽기> 에서
* 김재혁/ 시인, 고려대 독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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