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지
한영숙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불렸던 내 이름은 '꼭지'였다. 그런데 집안에서 정겹고 좋았던 그 이름이 동네에 나갈라치면 아이들의 놀림거리가 되어야 했다. "꼭지야, 꼭지야, 담배꼭지, 호박꼭지, 젖꼭지······." 학교에 입학해서까지도 그 이름이 따라붙었다. 그리고 그 놀림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비교적 활달한 성품을 지녔지만 놀림을 받을 때마다 나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부끄러울 수가 없었다. 내 이름 '꼭지'가 싫었다.
우리집은 온 동네 소문난 딸부잣집이었다. 부모님꼐서는 딸을 내리 다섯이나 두셨던 것이다. 그 다섯 공주 중 난 셋째였다. 우리 부모님 세대만 하더라도 아들을 낳아야만 안팎으로 위신이 섰다. 부모님꼐서는, 꼭지가 똑 떨어지듯 나를 끝으로 딸을 마감하고 아들이 태어나기를 간절히 바라셨다. 그 희구를 담아 어린 나를 '꼭지'라는 아명兒名으로 부르셨던 것이다.
시인으로 입문하고서야 그 이름이 예쁜 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닉네임으로 '꼭지'란 이름을 쓴다.
'꼭지'는 순우리말이다. 그리고 그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거느리고 있다. 꼭지는 '시집가지 않은 처녀'를 일컫기도 한다.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를 테지만 예전 어르신들은 익히 알고 쓰던 말이다. 그래서 어르신들은, 혼례초야 치른 것을 '꼭지를 땄다'고 했던 것이다. '꼬지성님'이란 말도 재미있다. '포교捕校의 지휘 아래 도둑 잡는 일을 거드는 무리의 우두머리'를 가리켜 '꼭지' 뒤에 '성님'을 붙여 친근하게 부르곤 했다는 것이다.
처음 열매 맺기 전에 제일 먼저 세상에 얼굴 내미는 꼭지, 참 예쁜 이 우리말이 나의 첫 이름이 되어 주었다니! 그지없이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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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을 사랑하는 『문학의 집 · 서울』 소식지 <내가 사랑하는 우리말 우리글>에서/ 제230호(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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