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제7회 형평문학상 수상자/ 자선 대표시> 中
숲
김경인
나는 멈춘다,
검은 사람들과 더 검어질 사람들이
서서히 낯빛을 잃어 가는 숲길에서
언 땅 속에 꼼지락거리는 말들을 파헤치는 말발굽의 아우성과
식물도감 십칠 페이지 낡고 찢어진 풍경을 다 잊고서
너는 받아 적는다,
부화 직전 깨져 버린 청청록록 알껍질과
이제 막 날아오른 푸른머리흰눈의 발에 묶인, 길게 늘어진 철끈을
너는 그것을 알고 있다,
한 줌 어둠 안에 사로잡히기 위해 네가 펼쳐 든 대낮의 연분홍 양산이 접힐 때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너의 목소리
빌려 준 나의 팔다리들
그리고 아직 내 것인, 옛집 문고리에 달라붙은 얼굴에 대해
네가 꽃이었을 때
숲은 흰빛.
밀서를 봉하기 위해 기꺼이 흘러내리는 촛농처럼 내가 흘러 들어간
내가 키운 편애와 편집의 호두나무야
울퉁불퉁한 열매를 잔뜩 달고 시름시름 자라나야지
여러 개의 물혹을 매달고 느리게 달려가는 추억처럼
파란 얼음 아래 어른거리는 물고기 비늘
내가 떠나온 시간의 사금파리들이 창백하게 반짝일 때
물속의 녹슨 자물쇠는
아무것도 고백할 것 없는 아이의 몸통에 다시 채워진다
너는 황혼 다음, 검푸른 침엽수림 거기 누군가 드문드문 놓아둔 하얀 조약돌
호주머니 속 작은 손전등
호주머니 속엔 차가운 손이 두 개
나는 두드림을 반복하는 녹슨 문고리
어떤 이름도 적힌 적 없는 종이
죽은 글자들을 뜯어 먹고 살찐 들쥐들이 짚 덤불 아래 비좁은 잠자리를 다투는
숲
숲으로부터
내가 경험하지 못한 문장이
가볍게 떠오르다 사라졌다
꼭 닫힌 창문에 서리다
지워지는 입김처럼
-전문-
▶"나의 시인이여, 이제 그만 죽어도 된단다*/-피흘리는 꿈, 바닥의 마음(발췌)_ 조재룡/ 문학평론가
김경인의 시는 감정이 단단하여, 감상에 빠지는 법이 없고, 성찰이나 관조에 붙잡히지 않으며, 고통의 허기를 날 것으로 기록하는 경우가 단 한순간도 없다. 이 삶은 무겁고, 무섭다. 정말로 이질적인 것을 하나로 연격하는 방법은 절묘하고 처절하다. 언어가 매개되어 무언가 둘 이상을 총돌시킨 다음, 이상한 것을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수구에서 붉은 피가 솟구치고 살점들이 걸어 나와 안부를 묻는다. (p. 시 37-38/ 론 307-308)
* 김경인 「초대」,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 문학동네, 2020, 59쪽
* 예심: 조말선 장철환 이현승 / 본심: 이하석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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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평문학』 2020년 통권2호 <제7회 형평문학상/ 자선 대표시/ 작품론> 中
* 김경인/ 1972년 서울 출생, 2001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한밤의 퀼트』 『얘들아, 모든 이름을 사랑해』 『일부러 틀리게 진심으로』, 현재 한양대 에리카캠퍼스 창의융합교욱원 교수
* 조재룡/ 문학평론가, 번역가, 고려대 불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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