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침판
김혜천
담쟁이가 벽을 덮을 모략으로
도톰한 잎새를 부풀린다
모호한 경계 틈새로 촉수를 뻗는다
기성의 담론과
새 시대 혁신 사이 벌어진 틈새로
불온한 의도가 손을 내민다
의도부터가 기망欺罔을 바탕으로 한 초록 나침판
흔들리고 가리고 흔들리고 가리고
유사가 판치는 소음의 시대
나침반은 언제나 정북을 가리키고 있어야 한다고
믿고 살아온 사람들의 현기증 사이로 확성기를 켠다
전류의 미세한 파장으로
잠시 빠르게 좌우로 흔들리는 나침판
거짓은 또 다른 것짓으로 변이되고
암각을 모사하여 마을의 벽화를 그린다
서로를 겨냥한 책채가 화려하다
자서전을 대필하게 할 날이 오기도 전
서로를 줄줄 흘리는 기성과 혁신들
한 봉지에 담겨 온통 물러터진다
팩트는 편집 가공되고
균열을 견디지 못한 벽은 스스로 무너져 내린다
-전문-
▶색채의 변주, '지금 이곳'을 견디는 방식들(발췌)_ 박완호/ 시인
김혜천의 「나침판」은 바깥쪽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한순간에 훑어내는 자아의 예리한 시선과 비판적 태도가 돋보인다. 그는 눈앞의 어쩔 수 없는 절망의 벽을 넘는 담쟁이의 일반화된 신화를 무너뜨리며 '불온한 의도로 손을 내미는' 새로운 담쟁이를 만들어낸다. 교과서적 상상력을 뒤집는 시인의 사유가 만들어낸 담쟁이의 새로운 의미는 바로 "의도부터가 기망欺罔을 바탕으로 한 초록 나침판"이다. 벽을 덮을 모략으로 모호한 경계 틈새로 촉수를 뻗어가는 초록 담쟁이는 푸르른 생명력을 떠올리게 하는 이제까지의 이미지를 순식간에 뒤집어 놓는다. 그것은 그동안 믿어온 가치의 전복이며, 견고한 아름다움은 추하고 나쁜 것으로 순식간에 뒤바뀐다. 기성의 담론과 새 시대 혁신 사이 벌어진 틈새에서는 "유사가 판치는 소음"이 가득하고, 끊임없이 흔들리고 가려가며 좌우로 갈팡질팡하는 바늘은 '나침판이란 언제나 정북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굳게 믿어온 사람들을 현기증에 빠지도록 한다. "거짓은 또 다른 거짓으로 변이되고" 확증 편향을 지닌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팩트가 끊임없이 편집 가공되는 현실 속에서 균열을 견디지 못한 벽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는 화자의 관점에서 볼 때, '지금'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진짜-가짜'를 감별해내는 힘을 스스로 갖추어야만 한다. 그에게 있어 '담쟁이'는 자아를 둘러싼 세계의 안팎을 똑바로 들여다봄으로써, 불온한 의도를 가진 누군가에게 농락당하지 않고 삶의 주체가 되어 살아가도록 하는 매개이다. 좌든 우든, 극단을 벗어나지 않는 한 어떤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주체 되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행위이다. (p. 시 295-296/ 론 307-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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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산맥』 2020-가을호 <미학적 통증과 사유> 에서
* 김혜천/ 2015년 『시문학』 으로 등단
* 박완호/ 1991년 『동서문학』으로 등단, 시집 『기억을 만나 적 있나요』 『염소의 허기가 세상을 흔든다』 『내 안의 흔들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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