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집에 두고 온 복숭아를 보러 가던.../ 김륭

검지 정숙자 2020. 12. 4. 01:05

  <2020, 제5회 동주문학상 수상작> 中

 

 

    집에 두고 온 복숭아를 보러 가던 여자가 말했다, 꼭 같이 보러 가요

 

    김륭

 

 

  과일들은 참 착한 것 같아요

  그래서 그래요 우리 그렇게 살아요

 

  좌판에 올라앉은 복숭아나 바나나, 그리고 수박처럼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어쨌든 우리 함께

 

  원숭이처럼 사는 게 처음은 아니잖아요

  바나나가 아니라 복숭아처럼 잘 생각해봐요 지금 우린 남겨진 걸까요

  버려진 걸까요

 

  단 하나뿐인 심장에게 단 한 번이라도 봉사한 적이 없는

  그래서 다정하게 우리 함께

 

  오늘 하루쯤은 미침, 완전한 결말을 기대하며

  아무도 모르는 이야기의 머리를 베고 꼬리를 자른 다음

  내일은 마침, 오렌지처럼 상큼하게

 

  더 이상 사랑이 아니거나 이별이 아닐 때까지

  부엌칼이라도 좀 빌렸으면 싶었지만,

  여자가 말했다

 

  그건 어제의 일이잖아, 알아? 당신

  입술 다음엔 심장 그 다음엔 얼음이라는 거

 

  오늘이 다 가지도 않았는데 내일이 획- 지나갈 것 같은

  이런 날엔 말밖에, 나도 나를 한 번쯤은

  죽여보고 싶다고

 

  비라도 왔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의 끝은 언제나 그립거나 외로울 것

  찢어진 우산과는 무관하게

 

  여기까지 온 것만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라고

  혼자 죽지 않을 만큼 애쓴 거라고

 

  꼭 같이 가요

  잔털 북슬북슬해진 심장이 쓰는 이야기의 끝을

  보러가요

    -전문-

 

 

   * 본심 : 장옥관  유성호  김행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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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산맥』 2020-가을호 <제5회 동주문학상>에서

   * 김륭/ 200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2007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 『원숭이의 원숭이』, 청소년 시집 『사랑이 으르렁』,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 『삐뽀삐뽀 눈물이 달려온다』 『앵무새 시집』 등, 이야기동시집 『달에서 온 아이 엄동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