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잘 곳/ 최동문

검지 정숙자 2020. 11. 28. 00:50

 

 

    잘 곳

 

    최동문

 

 

  이사를 한다

  가볍지 않은 소유의 무게

  욕심으로 맡은 무거운 짐들을 천국으로 보냈다

 

  빈집이 된 아파트 열쇠를 다른 여행자에게 주었다

  가볍다

  가벼운 살림을 무처럼 뽑아 이삿짐 트럭에 실었다

 

  트럭은 길을 돌아 도시의 외곽으로 달렸다

  오래된 한옥에 짐을 풀었다

  첫 밤이 와서 도배한 다락에 기어올라

  낮은 천장 형광등을 보며 누웠다

 

  오래전에 다락방에서 자고 일어났던

  아기의 울음이 들렸다

  창문 문풍지가 된 아가야, 이제는 웃으며 자자.

 

  풀지 못해 누워있는 책은

  마흔 개 종이 상자에서 아직 자고 있다

  책은 하나씩 뽑아 보는 천사의 날개 깃털

 

  도시의 힘을 찾아다녔던

  차가운 길에 앉은 선잠이 있다

  등에 지고 출발한 책을 깨워 한 권씩 버렸다

  천사는 날개를 잃고 선녀가 되었다.

 

  뜨거운 커피 한 잔 식히는 사이에

  찬물을 한 사발 마셨다

  이제는 아무도 없다

  모자를 쓴 한낮과 흙 마당은 축복

 

  굶어도 홀로 배고프다

  꽃밭에, 잔자갈에, 맨발이다

  느린 걸음이 잘 곳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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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래시학』 2020-가을호 <미래시학 시단 >에서

   * 최동문/ 경북 경주 출생, 1996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 『밤의 태양』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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