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가 산을 넘다
주경림
비 그치자
명주달팽이가 오지항아리를 기어오른다
배다리를 오므렸다 폈다
물기를 머금은 항아리 산을 잘도 오른다
항아리 불뚝한 배에 이르자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앞더듬이를 뒤로 젖히며 돌아돌아 오른다
등에 진 황토색 집이 무거워
할딱할딱
껍데기 속 심장이 뛰는 소리가 보인다
이윽고 항아리 아가리,
땀 흘려 올라와 보니 허공, 두리번거려보아도
달팽이가 좋아하는 물봉선화 꽃잎 한 장 없다
어제도 그랬듯이
머뭇머뭇,
달팽이는 뒷더듬이로 항아리 속 어둠을 짚어보다
다시 미련 없이
항아리 둥근 능선을 타는 내리막길,
이번에는 황토색 집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준다.
명주달팽이는 내일도 그렇게 산다.
-------------
* 『미래시학』 2020-가을호 <미래시학 시단 Ⅲ>에서
* 주경림/ 1992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 『씨줄과 날줄』 『눈잣나무』 『뻐꾸기창』 등
'잡지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잘 곳/ 최동문 (0) | 2020.11.28 |
|---|---|
| 독주/ 천융희 (0) | 2020.11.27 |
| 도깨비/ 윤인미 (0) | 2020.11.27 |
| 묘비/ 김(손)혜숙 (0) | 2020.11.27 |
| 안반(案盤)과 홍두깨/ 이경옥 (0) | 2020.1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