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달팽이가 산을 넘다/ 주경림

검지 정숙자 2020. 11. 27. 02:18

 

 

    달팽이가 산을 넘다

 

    주경림

 

 

  비 그치자

  명주달팽이가 오지항아리를 기어오른다

  배다리를 오므렸다 폈다

  물기를 머금은 항아리 산을 잘도 오른다

 

  항아리 불뚝한 배에 이르자

  천천히, 아주 천천히

  앞더듬이를 뒤로 젖히며 돌아돌아 오른다

  등에 진 황토색 집이 무거워

  할딱할딱

  껍데기 속 심장이 뛰는 소리가 보인다

 

  이윽고 항아리 아가리,

  땀 흘려 올라와 보니 허공, 두리번거려보아도

  달팽이가 좋아하는 물봉선화 꽃잎 한 장 없다

  어제도 그랬듯이

 

  머뭇머뭇,

  달팽이는 뒷더듬이로 항아리 속 어둠을 짚어보다

  다시 미련 없이

  항아리 둥근 능선을 타는 내리막길,

  이번에는 황토색 집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준다.

 

  명주달팽이는 내일도 그렇게 산다.

 

 

   -------------

   * 『미래시학』 2020-가을호 <미래시학 시단 >에서

   * 주경림/ 1992년 『자유문학』으로 등단, 시집 『씨줄과 날줄』 『눈잣나무』 『뻐꾸기창』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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