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원구식
높은 곳에 물이 있다.
그러니까, 물이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말은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물은 겸손하지도 않으며
특별히 거만하지도 않다. 물은 물이다.
모든 자연의 법칙이 그러하듯,
낮은 곳으로 흐르기 위해, 물은
높은 곳으로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이 평범한 사실을 깨달은 후
나는 네게 "하늘에서 물이 온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너와 내가 '비'라고 부르는 이 물속에서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은
자전거를 타고 비에 관한 것들을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내리는 이 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지금 이 순간 이 비가 오지 않으면 안 될
그 절박한 사정이 도대체 무엇인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면서 자전거를 타고
하염없이 어디론가 물처럼 흘러가는 것인데,
어느 날 두 개의 개울이 합쳐지는 하수종말처리장 근처
다리 밑에서 벌거벗은 채 그만 번개를 맞고 말았다.
아, 그 밋밋한 전기의 맛. 코피가 터지고
석회처럼 머리가 허옇게 굳어질 때의 단순명료함.
그 멍한 상태에서 번쩍하며 찾아온 찰나의 깨달음.
물속에 불이 있다!
그러니까, 그날 나는 다리 밑에서 전기뱀장어가 되어
대책 없이 사물의 이치를 깨닫고 만 것이다.
한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기 위해, 물은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증발시켜 하늘에 이르렀는데
그 이유가 순전히 허공을 날기 위해서였음을
너무나 뼈저리게 알게 된 것이다.
바위가 부서져 모래가 되는 이유,
부서진 모래가 먼지가 되는 이유,
비로소 모든 존재의 이유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하늘에서 물이 온다.
우리가 비라고 부르는 이것은 물의 사정, 물의 오르가즘.
아, 쏟아지는 빗속에서 번개가 일러준 한마디의 말.
모든 사물은 날기를 원하는 것이다.
-전문, 『비』(문학과지성사, 2015)
▶시와 이미지 · 2/ 이미지와 사유의 혁명(발췌)_ 박대현/ 문학평론가
이 시는 '비'라는 관념을 해체한다. '비'의 유기적 이미지를 해채함으로써 '물'의 본래적 이미지로 되돌리고 있다. "높은 곳에 물이 있다"는 문장으로써, '비'를 둘러싼 유기적 이미지는 분해되고 만다. "물이 항상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지상의 고정관념도 분해된다. 물은 증발하여 "높은 곳으로 올라"간다. 그리하여 시인은 "하늘에서 물이 온다"고 "분명히 말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비'라는 의미의 고정점을 벗어난다. '비'를 "높은 곳"에 있는 "물"이라고 하거나, "하늘에서 물이 온다"고 진술함으로써 '비'의 이미지를 해체시켜버린다. 시인이 획득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계에 대한 새로운 사유다. 즉, 시인은 기성의 사유에 갇혀 있는 세계의 사물들을 해방시키는 데 집중한다. "바위가 부서져 모래가 되는 이유,/ 부서진 모래가 먼지가 되는 이유"는 "모든 존재의 이유"와 통한다. 그것은 "모든 사물은 날개를 원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바위'는 '바위'로부터 벗어나고자 하고, '모래'는 '모래'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시인은 낡은 의미를 벗겨냄으로써 세계에 주름 접힌 내재성의 평면을 열어 보인다. 날기를 원하는 사물의 욕망은 시인의 욕망이다. 의미의 고정점에 정박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내재성의 평면을 펼쳐 보이고자 하는 욕망, 세계의 사물은 이미지의 유기적 체계를 벗어나고자 하며, 시인은 세계의 실재에 접근하고자 한다. 인간 중심의 유기적 이미지는 이 세계를 감금하는 것과 다르지 않고, 결국 인간의 사유를 정체시킨다. 모든 사물이 날기 원하듯, 시인 또한 자유롭게 사유하기를 욕망한다. 이 시는 '비'의 유기적 이미지를 벗어남으로써 이미지의 해방감을 드러내는 동시에, 세계 속에 주름 접힌 내재성의 평면을 열어보이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낸다. (p. 시 69-70/ 론 7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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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펀』 2020-가을호 <박대현 평론가의 현대시 읽기> 에서
* 박대현/ 2005년 ⟪부산일보⟫ 신춘문예로 평론 부문 등단, 평론집 『헤르메스의 악몽』 『우울한 것의 추락』 『혁명과 죽음』 『황홀한 아파니시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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