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속의 벽
김완하
애초에 치마가 먼저 생겨났을 게 분명해. 동물의 가죽을 벗겨 그것을 천으로 휘두르면 통이 생기고 그 안에 몸을 숨기게 되었지. 옷이 되는 최단시간으로 오로지 자신이 스스로 옷을 지어 입던 순간. 그러다 어쩌면 우리 서로를 경계하게 되었겠지. 나의 몸을 가리며 서로 상대를 믿지 못하게 되었겠지. 우리가 치마 안에 더 많은 것을 숨기기 시작하면서.
그러던 한 순간 바지가 나왔지. 속도가 세상을 지배하며 바지는 주류를 이루었겠지. 그러다가 헛바지론도 나왔지. 그런 뒤로 바지통은 넓어졌다 좁아졌다 반복하며 치마를 그리워하게 되었겠지. 몸이 먼저 안다고 했지. 치마를 입다가 바지를 입다가. 단순함도 인정하고 행하지 않으면 하나의 벽이 되고 마는 것.
-전문-
▶시적 양식과 새로움의 추구(발췌)_ 성은주/ 시인
위 시의 제목 「길 속의 벽」이 암시하듯이 삶의 관성과 습관의 힘을 상기시키고 있다. 삶의 편리를 위해서 태어난 치마가 바지로 바뀌면서 서로를 구분하고 벽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지적하였다. 생각의 벽을 타고 오르는 습관의 힘은 새로운 변화와 조응하지 못할 때 두터운 벽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함도 인정하고 행하지 않으면 하나의 벽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길과 벽은 하나인 것이다. 즉, 길도 벽이 되고, 벽도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의 연관성을 유연하게 바라보며 벽도 새로운 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p. 시 275/ 론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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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층』 2020-가을호 <다층소시집/ 신작시/ 해설> 에서
* 김완하/ 1987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길은 마을에 닿는다』 외, 저서 『김완하의 시 속의 시 읽기』 외
* 성은주/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공저 『행으로 뜨는 시』 1. 2. 『시창작에 이르는 길』 『시와 문화콘텐츠 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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